나의 35년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할 단어를 드디어 찾았다.
"속음".
이것보다 더 내 인생을 일축하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 단어는 없으리라.
1. 유년기의 35년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할 단어를 드디어 찾았다.
"속음".
이것보다 더 내 인생을 일축하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 단어는 없으리라.
1. 유년기
출발부터 되짚어볼까.
갓난아기가 뭘 알았겠나.
나는 국적도 정한 적 없다.
이런 몸뚱아리를 원한 적도, 이 성별을, 이 부모를, 아니, 애초에 내 탄생의 결정권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바글바글한 지하철 인파 속에서 끝으로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한 출입문 쪽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의 등을 턱 하고 밀어 바깥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새도 없이 출입문은 닫혔으며 열차는 출발해버렸다.
나는 이 역이 어느 역인지도,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래, 마치 이런 꼴이었다.
2. 소년기
나는 모범생이었다. 어느 시점 까지는.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범생이였다고.
주목받는 아이였고, 간간히 영재, 수재 소리를 들었으며
선생님들은 나를 총애했고, 일찐 무리들은 나를 건드리지 않고 특별대우 했다.
나는 이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결론적으로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것은 속은 것이었다.
난 나에게도 속았으며, 많은 선생들에게도 속았다.
전반적인 사회 풍토와 분위기, 온갖 언론에도 미묘하게 속아들었다.
일단 나는 어느 시점 이상부터 공부와 비례하여 성적이 따라오지 않았고,
그것은 나에게 스스로 속은 것이었다.
나는 어느 한계점 이상 노력을 쏟지 못했으며, 우울로 젖어들어갔다.
3. 기독교와의 만남
그 즈음, 촉망받던 아이의 대세가 기울어 절망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시절,
아주 유약했던 시기, 아마 고등학교 1~3년생 시절 사이에
나는 아주 대단히 위험한 것에 속아버리는데, 그것은 종교였다.
모두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와 같거나 비슷한 성향인 사람에겐 신신당부하고 싶다.
나와 같은 패착을 저지르지 마시길.
기독교적 신앙은 내게 완벽한 도피처였다.
나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거나, 자신을 크리스쳔이라 여기는 정도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생을 걸었고, 모든 방향성과 초점을 신에게 맞췄으며,
모든 말과 행동과 내쉬는 숨에도 그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의존'이었고, 내 인생의 '위탁'이었으며,
오늘날 탄생한 신조어 - '가스라이팅'을
누군가에 의해 꽤나 철저하게 당했다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오로지 공부에만 더 몰두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공부를 하여 나의 대학 네임벨류를 업그레이드 했어도
그 결과가 현재의 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근거는 없다.
신앙이 아니었다면 아마 다른 길로 엇나갔거나 집착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물론 그 확률은 크지 않지만.)
그러나 어쨌거나 자명한 사실은, 나는 그 시절 기독교에 지독하게 속게 되어
훗날 뼈저리게 큰 후회가 발생할 아주 긴 여정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도피처로 신앙을 갖지 말라.
당신이 만들어낸 그 신은 당신이 원하는 그 얄팍한 것을 주지 않는다.
당신의 신은 당신을 더 철저히 파괴하여 가진 모든 것을 내놓도록 할 것이다.
아마 당신은 온 평생 신 없이 살 수 없는 끝없는 굴레에 빠져 죽거나,
그 굴레를 빠져나오기 위해 수십 배에 달하는 이자를 토해내야 할 것이다.
바로 나처럼.
그리고 그 이자는 어느 은행의, 어느 증권사의 레버리지보다 세다.
다시금 분명히 말한다.
나는 적당히 믿으며, 적당히 자기 잇속도 챙기며
큰 고민에 부딪치지 않고 잘 사는 95%의 무늬만 크리스쳔들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어쨌거나 고교 3년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입시가 한창이던 시절, 대학 진학을 고르는 와중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학원 원장이 나의 진로를 위해 기도와 예언을 해 주는 것에 나는 또 속았다.
그 길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나는, 재수를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4. 청년기와 기독교
20대 초반의 유학 시절에도 나는 차로 40분 거리의 교회를 매일같이 섬기며 신을 의지했다.
그 당시에 인도된 교회에서도
목사-성도와의 분열, 파벌 형성, 설교 중 성도를 모욕하며 쫒아내는 광경 등 못볼 꼴 참 많이 봤다.
종국에는 어느 미국 목사의 대지진 예언 한 마디에 교회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경험을 했다.
교회가 없어진 나는 평생 의료선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뉴질랜드로 가서 침구술을 공부하던 중,
쓸모없는 학위와 돈만 밝히는 단체임을 알게 되어 캐리어를 들쳐메고 야반도주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90여일을 남겨두고 다시 공부를 하여 수능을 쳤다.
지거국 사범대 등을 갈 수 있는 점수를 받았고 실제로 붙었지만
나는 사모하는 교회가 서울에 있어, 그곳을 다니기 위해 신학대학을 선택했다.
그 사모했던 교회는 점점 부모와 연을 끊으라 하였고,
실제로 학교 근처에서 멀리 떨어진 교회 옆으로 이사를 오게 만들었다.
부모가 월세를 내 주는데, 부모에게서 전화를 오면 받지 말라는 아이러니한 명령이었다...
밖에서 친구를 만나 햄버거 하나를 사먹는데에도
연락하여 허락을 맡아야 하는 지독한 가스라이팅을 견디지 못해 결국 뛰쳐나왔다.
5. 나에게 인생 전반에서 '기독교'라는 의미
이외에도 교회에 사기를 당한 역사를 보자면 더 많다. 굳이 길게 적고 싶지도 않지만.
초등생 시절 매일 새벽기도 피아노 반주를 하던 내 머리에
차가운 손으로 안수기도를 하던 목사의 양복에서는 묘한 쿰쿰한 냄새가 났었다.
나중에 PD수첩을 통해 영수증 내역과 함께 방송이 되던 날, 알게 되었다.
바로 그것이 밤새 룸싸롱과 나이트에서 질펀하게 놀고 오셨던 냄새였다는 것을.
또 다른 목사는 아들 세습과 100억대 횡령,
대전 모텔에서 손녀뻘 되는 여자와 함께 들어가는 모습이 녹화되어 전국에 방영되었다.
내가 십대 시절 5~6년 몸담았던 교회의 목사였다.
고교시절 다니던 큰 교회 목사도 결국 아들 세습.
대학시절 다니던 교회 목사도 이단 판정을 받고,
그 외에도 뇌물, 정치, 장삿속 운영들을 하는 것이 이제는 뻔히 보인다.
어찌 나는 골라도 이런 교회들만 골라 다녔던 것일까?
직장인이 되었다. 돈 걱정, 진로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노예의 삶에도 내가 비로소 정의하는 행복은 없었다.
행복할 줄 알았다. 또 속았다!
수많은 유튜버.
뉴스.
통틀어 정보.
속지 않았던 것.
부모의 사랑.
아이.
그리고 이 홈페이지의 일기들.
그래서 이곳이 귀중한 것.
모두가 속고 속이려는 세상에.
한 줄기 오아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