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t to the Paradise

 

<제 2장> 신들의 꿈

 

2. 나는 나의 세계를 보살핀다

 

2-1. 현실의 두 단면

 

세상이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진리는 잡으려 하면 할수록 달아난다.

재미있는 비밀은 이것이다.

세상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숨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씌워주는 가면을 언제든지 뒤집어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입자와 파동의 두 면모를 보여주는 우주. 

그들은 가면을 시시각각 바꿔 껴주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세상은 도망다니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동의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거울’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 우리가 현실에 대해 가정하는 것이 무엇이든 고스란히 반영된다. 

 

단순히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현실은 거울처럼 두 세계를 가지고 있다. 

물질의 세계와, 지각의 한계 너머에 있는 비물질세계이다.”

 

트랜서핑은 그 비물질세계(거울의 저편)를 가능태 공간이라 대답한다.

모든 가능한 사건들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 정보체 말이다.

 

사실, 누구든지 밤마다 그곳에 가고 있다.

꿈은 환영도 아니고, 상상해 낸 결과가 아니라, 

영혼이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정보장에 직접 접속할 수 있고,

정보장(가능태공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나리오와 무대장치들이

영화필름의 각 장면들처럼 ‘정적인’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

이 필름이 돌아가는 현상을 ‘시간’이라 칭하는 것이다.

추가로, 마음은 수동적 관찰자의 역할을 하며, ‘생각발생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브론니코프 바체슬라브가 설립한 국제인간발전 아카데미 예시)

육안이 없이도 투시하는 아이들.

아인슈타인이 말한 외부로부터의 깨달음, 

브론니코프가 말한 인간의 ‘초의식’(인간 외부에 있는 어떤 매체) 

그것을 뭐라 부르든 간에 이는 가능태 공간을 의미한다.

(www.bronnikovmethod.com

 

마음(또는 두뇌)은 영혼을 통해서 가능태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가능태가 실제로 실현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트랜서퍼로서의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현실을 의도적으로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사념 에너지는 특별한 조건 하에서

가능태 공간의 특정 섹터를 물질화시킬 수 있다.

이 특별한 조건은 바로 ‘영혼과 마음의 일치였고

그 때 마법의 힘인 외부의도가 발생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외부’라는 뜻은, 사람의 외부에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마음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사람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실제로 외부의도에 접속할 수 있다.

그 강력한 힘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키면 

믿기 어려운 놀라운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다.

 

물론, 아틀란티스와 같은 고대 문명인들이 사용했던 능력(지혜)을

일상의 삶에서 활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잃어버렸으므로)

하지만 트랜서핑에는 우회로가 있으며, 

이 우회로로 외부의도를 작동시킬 수 있다.

즉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보통 인간들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을 바꿔보겠노라고 열심히 달려든다.

하지만 (1)반대로 그 그림자의 주인(본체)을 바꿔야 하며,

그 본체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우리의 사념의 방향성특성이다.

 

원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데는 바라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세상이라는 ‘이중거울’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 그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2-2. 백일몽 같은 삶

 

모든 인간의 육체와 마음은 물질세계에 속해 있고,

영혼은 가능태 공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울의 경계면에서 균형을 유지중이다.

 

인간은 이중거울의 경계선에서 태어났으며, 

배역이 멈추면 다른 가면을 쓰고 재등장한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환생이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현실 속에서 꿈꾸는 백일몽같은 삶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기억해 낼 수 없다. 

 

왜 4살 이전의 기억은 나지 않는가? 

아이가 의식의 각성도가 낮아서? (아니, 오히려 아이들의 의식의 각성도가 더 높다.)

아이의 주의를 한 곳에 집중하게 꾸짖음으로써 인식의 범위가 좁아지며 지각력이 없어진다.

자라가며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된다.

아이들은 삶이 한갓 게임일 뿐임을 알기에 중요성이 낮고, 마치 관객처럼 초연하게 행동한다.

성인들에게 놀이는 끝났고 삶은 심각한 것이 되어 있다.

 

자각몽에서는, 자신을 기억해 내는 순간 꿈의 방향을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다.

반대로 꿈 내에서도 자신이 꿈을 꾸는 중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는 완전히 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현실도 마찬가지이며, 

내가 실로 누구인지를 기억(알아차릴)할 수만 있다면 삶이라는 꿈도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트랜서핑은 내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까지 높이 올려주지는 않지만, 

눈 감고 따라가도 될만한 나만의 행로를 보여준다.

 

꿈 속에서 깨어나려면 ‘현실’이라는 기준점이 필요하지 않은가?

꿈과 다른 현실(기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현실(기준점)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현실을 꿈처럼 인식해보라.

거리를 걸을 때나, 누군가 얘기하거나, 일상적 일을 할 때 깨어나라! 

주위를 살펴보고 일어나는 일들을 명료히 바라보라. 

객석으로 내려가서 지켜보라. 

관찰자로 머물고 자신을 빌려주며 초연하게 행동하라.

현실에서 잠자고 있을 때 나는 상황을 통제하기는 커녕 펜듈럼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깨어있는 의식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의 방향을 항상 제어해야 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노력없이 자동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이것만 잘 해도 나머지 트랜서핑의 원리를 수행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트랜서핑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 이 때까지 이야기했던,  ‘중요성 낮추기’, ‘가능태 흐름 타기’, ‘의도의 조율’이다. 

이 원리들은 여러 가지 불쾌한 것들을 피하면서, 

이 미로와 같은 삶에서 자신있게 눈 감은채로 움직여갈 수 있게 해 준다. 

그 다음 우리는 현실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이중거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모든 것의 위에는 ‘신’이 있을 것이다. 

이제껏 착각해 왔던 꿈이라는 현실,

그 위의 다른 차원의 기준점의 시작일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꽃의 꿀을 따는 나비들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거기에도 다양한 꽃이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도 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기 보다는 

거기에 흥미있는 사람들이 풀도록 놔 두자.

우리는 꽃의 감로만 즐기며 꿀만 빨면 된다.

 



2-3. 신의 아이들

 

온 마음으로 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실제로는 자기의 자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행동이다.

자아가 모욕감을 느끼기 전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자아가 일어난다.

 

자아의 유일한 목적자기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 중요성을 확인하지 못하면, 

자아는 노여워하고 마음의 불편을 느끼며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그 때 자아의 고삐를 풀어주어 마구 내달리게 하거나(공격적 돌변 - 범죄자, 이기주의자), 

자아를 억압하는 방법(신에게 귀의, 이타주의자)이 있다.

바로 그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자기 에고(ego)를 벗어나기 위해 신에게 향하는 것은 내적 중요성의 길이다.

나 자신을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이 심판하게 하는 것이 내적 중요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신에게로 가는 진정한 길이다.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성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에고는 사라지며 온전한 개성만이 남는다.

나를 틀에 끼워맞추려 하고, 내가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영혼에 등을 돌리게 하면서 “나처럼 따라 해!”라는 펜듈럼이다.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옳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으라.

신은 밖이 아닌 내 안에 들어 있으며,

나 자신이 바로 신의 파편이다.

 

나, 우리 안에 신의 일부가 있다면 우리는 신의 자녀들이다.

성직자들은 본질적으로 신의 ‘중개인’ 역할을 취하는데,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중개인이 필요한가?

 

종교는 보다 더 지지자들에게 모진 형태의 펜듈럼이기 때문에

갈수록 그들에게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영적인 길)는 고행의 길로 이어져있으며, 세속사에 관심이 없어지는 쪽으로 간다. (내 경험상도 그랬다.)

펜듈럼의 둘째 법칙(조직의 안정을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한다는)에 따라

종교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지지자 자신을 헌신적으로 바칠 것을 강요한다.

정말 그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어지며, 

신과 대화한다는 환상에 빠져 살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영혼은 꽉 막힌 상자에 갇혀있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 함정에 빠지지 말라. 

나는 나 자신의 풍요와 평안과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영혼(나)은 왜 이 물질세계로 온 것인가?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왔는가? 

영혼은 물질세계의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알기 위해 오는 것이다. 

값진 삶에서 얻는 신의 기쁨을 빼앗지 말라.

 

신은 나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 

신이 전능하시고 나는 무능하다는 메세지를 들었는가?

조직의 눈에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엣가시다.

 

온 정성을 다해 신을 숭배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진다.

자녀들이 나를 숭배할 필요가 있는가? 친구처럼 지내기를 더 좋아한다.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현실로 실현시킬 권리와 능력이 있었던 우리들을

바로 그 신의 일들을,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 펜듈럼이다.

 

창조된 현실의 모든 측면을 체험하는 것

신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동창조, 신과 함께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과의 ‘대화’이자 교감이며 신의 기쁨이다.

신의 언어는 창조였던 것이다. 

 

내가 창조물을 만들며 기뻐할 때 신도 나와 함께 기뻐하신다.

내 안에는 창조주의 한 부분이 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2-4. 꿈의 극장

 

우리(인간)는 주변 현실을 어느정도 독자적으로 통제 아래 두려는 동기가 늘 존재한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을 하는가? 

그 또한 바로 ‘창조하기’와 ‘현실을 조종하기’에 있다.

이것이 모든 삶의 의미이다.

 

그런데, 신은 어떻게 조종할까?

 

펜듈럼(특히 종교)의 세뇌에 의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하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자비를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 뿐만 아니라, 무신론 또한 종교의 일종이며 

종교 펜듈럼이나 무신론이나 둘 다 인간은 꼭두각시 인형이 된다.

은총을 기다리느냐, 장애물과 전투를 하느냐 둘 중 하나밖에 더 되겠는가.

자신의 신성함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이만

외부의도의 도움을 받아 모든 걸 조건없이 얻게 된다.

 

가령 이런 명백한 모순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숭배를 요구하는 통치자로서의 신이

세상의 불법과 만행, 악인들이 만연하고 정의가 없는 모습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종교 펜듈럼 지지자들은 “신의 뜻이다”, “심판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등의 거짓말들을 한다.

그 모든 추측들을 치워버리고 다시 생각할 때 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것에 대해 여러 억측을 늘어놓기 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은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무대에 오른 참가자들의 의도에 따라 자유로운 희곡이 전개될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은 심판하는 것도 아니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며, 

상과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다스리고 보살피는 것도 아니다.

신은 자신의 일부로서 각 생명체에 영혼을 불어넣고 

각자의 인식범위 내에서 현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을 뿐이다.

 

인간에게부터 광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정 수준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식물 또한 감정을 느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교제한다. 

실험결과에서 그들은 질투까지도 느끼는 것을 확인했다.

DNA도 마찬가지다. 

DNA 분자는, 구조적 정보뿐만 아니라 DNA의 ‘기분’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기분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들보다 인간이 상대적으로 좀 더 깨어 있을 뿐이다.

동식물 포함 모두는 자신의 꿈속에서 살면서 

항상 뭔가를 원하며, 목표를 가지고 달성하고자 한다.

목표달성의 과정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단세포부터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의 의도는

나는 효과적으로 현실을 조종하기 위해 행동하고 노력한다”이다. 

(이 문장으로 진화론 또한 설명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예를 들어,

날지 못했던 조류들이 여러 대의 과정을 거쳐

‘나는 자유롭게 날 수 있다’는 의도를 가지게 되고,

그 의도가 새로운 가능태를 실현시킴과 동시에,

펜듈럼의 두 가지 법칙(날 따라해! + 조직의 이익!)에 따라 결속하고

파괴적 속성에 따라 다른 종을 멸종하고 대체시키며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현실을 창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도를 통해서 현실을 조종(컨트롤)한다.

우리의 세계는 꿈의 극장이며, 

신은 관객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자, 배우인 것이다.

 

삶의 불운과 불의에 대한 의문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신은 각 생명체에게 각자의 지각 수준에 따라 현실을 형성할 권리와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각자의 지각 수준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 보자면,

모든 생명체가 깨어있는 의식으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의도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의식적인 꿈속에서 흐리멍덩하게 뭔가를 원할 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명료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의도는 분명치 않고, 흐릿하며 무의식적이다.

 

높은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은,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이 외부의 영향이 아닌 의도에 종속되는 의식적인 꿈을 꿈으로써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내가 어떤 의도를 표명하면 그것은 곧 신의 의도다. (의심이 가능한가?)

신의 일부분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면, 

나의 의도는 곧 신의 의도인 것이며 동시에 신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다.

간청하지도, 요구하지도, 추구하지도 말고, 창조하라.

신이 자기 자신에게 간청하는가? 

신이 의심하는게 가능한가?

그는 원하는 것을 가질 뿐이다.

 

신은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며 어렵게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받는다.

신이 그리도 무능해서 뭔가와 안간힘으로 싸우느라 진을 뺄 것 같은가?

꿈에서 깨어나 처음부터 갖고 있던 특권을 활용하지 않겠는가?

내가 준비만 된다면 기술적인 문제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