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를 찾았다.

공 하나를 뽑아보라 하여 뽑았더니 이 문구가 들어있다.

'바람은 언제나 다시 불어요.'

순간 부는 바람결에 눈이 시려운 듯 울컥하는 감정이 찾아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어느새 내가 그토록 꿈꾸는 한 줄이 되어버린 가사 한 문장.

나의 마음을 울렸던 소재는 언제나 '바람'이었다.

이름모를 시인의 시를 찾았을 때, 그 시에는 바람이 들어있었다.

'끝...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나의 좋아하는 노래들에도 언제나 바람이 들어 있다.

 

바람은 언제나 다시 불어요. 

지금은 바람이 멎은 것 같아도, 또 다시 불테니 걱정 말아요.

그 때에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말고, 바람을 따라 가 보아요.

 

그 어떤 음악 중에도, 내 귓가를 때리는 바람의 소리에는 비할 것이 없다.

바람 소리는 아주 시끄럽고 간혹 옆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게 하지만

나는 그토록 감미롭고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소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잃지 말자 다짐했건만

나는 오랜시간을 거치든, 수시로든 현실의 부정성만을 찾으러 되돌아온다.

어쩌면 이 곳이 제자리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이 자리에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다면, 이 곳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 사이 놀랄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나의 일과 관련되어 있는 한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했었고,

나와 가까운 한 사람은 이혼 소송중인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그토록 빨리 이별하고 싶었을까.

 

현생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리할 분은 모이세요.

거처는 따로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갈 수도 있어요.

대신 지구는 떠나야 합니다. 과거의 사람들 모두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전히 모셔드립니다.

 

이 단순한 모집 공고에 과연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일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스위스의 안락사 도입을 가지고도 적극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우리는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아니 왜 이런 부자가 여기로 와 있지? 

이 사람은 행복한 것 같아 보였는데.

저 어린 학생은 앞으로 지구에서 살 날이 더 많은데 굳이?

 

아니, 어쩌면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우리들은 고단하다.

피곤하단 말이다. 아주 모든 면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려 해도 어느새 권태와 허기짐에 일어나야만 하는,

그럼에도 다시 생존을 위한 사투와 경쟁에 들어가야 하는,

그러면서도 인간성과 도덕성은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

온갖 모순 투성이 속에서 우리는 눈이 떠지고 코로 숨이 쉬어지니까 다시 일어나 세수를 한다.

 

365일 중에 364일이 메마르고 가물었지만

어느 하루 중 한 때에 반짝이는 것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찾던 한낱 인정 한마디였을 뿐이라도.

사랑한다는 진심어린 한 마디 뿐이었더라도.

간절하고 그리운 것을 만나는 한 장면이었을 뿐일지라도.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 말.

생각해보면 이만한 비효율이 없을지라도.

이보다 수지타산이 안 맞는일이 없는 미련한 일일지라도.

바보스럽게 우리는 아파 뒤지는 날까지 이 세상을 살아간다.

점점 냄새나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늙은이가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약속을 지키니까.

태양은 오늘도 다시 뜨고,

구름도 언제나처럼 얼굴을 비추고.

바람도 언제나 다시 불어오니까.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사리처럼 남기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딸의 환한 미소.

남에게 베푼 친절에 베어온 행복.

대가없이 찾아온 행운.

 

"바람은 언제나 다시 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