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을 따라 난 자전거도로를 달릴 때면 바람이 말을 건다.
그 속삭임은 때로 주변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을 만큼 시끄럽고 같은 말들을 반복하지만 질리지 않는다.
물길과 친구처럼 함께 뻗어있는 자전거길은 막 청소를 마친 듯이 깨끗하다. 자전거 바퀴도 말을 멈추고 이제야 숨을 고르며 돈다. 행인도 자전거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가와 아파트들 사이로 줄지어 뻗어난 하천과 끝을 알 수 없는 자전거길 저 끝에서 붉은색 노을이 막 올라오고 있을 때, 나는 다시 떠올렸다.
나는 언젠가 흐드러지게 펼쳐진 녹색의 초원 위에서 이젤과 의자를 두고 누워볼 수 있을까.
털썩 누운 나는 바람의 속삭임과 꿈의 조각들을 주워 음악을 빚어내고 색을 입혀 세상에 잉태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인적이 드문 포항 어느 동산에서 잔디에 누웠을 때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나는 돈에 대한 걱정이 없이 수 개월 단위로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볼 수 있는가?
그러한 일들을 경험으로라도, 체험판으로라도 한 번이나마 마주할 수는 있는가?
나는 한 번이라도 그것을 해 볼 수조차 있는가?
"희망은 좋은 것이야, 레드. 좋은 건 쉽게 사라지지 않지."
쇼생크를 탈출한 앤디가 편지에 적었듯 나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내게 있어 이 철학 또는 철칙은 반강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희망이 전혀 없이 살아 보았기에 가능했다.
다만 내가 아직도 멈칫하는 이유는, 주변을 둘러보면 (물론 외부적인 시선이겠지만) 희망을 가지고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 보인다는 서글픈 사실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내세를 만들어내고 희망을 그 알 수 없는 곳, 죽음 뒤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지금의 겪는 절망적인 현실과 고통들을, 스스로가 설정한 미래 이후에 받는 보상과 치환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 작용만 거친다면, 지금의 현실을 이겨낼 힘을 스스로 얻게 되고, 또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도와주고 힘을 준다고 착각하기도 하며 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심리작용은 보기보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극단적으로 적용하면 지금의 자살폭탄테러를 자행하는 이들도 이와 동일한 사고구조 속에 그러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삶이 그렇게 끝나고 상상하는 것처럼 엄청난 보상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고 심지어 축하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고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종결한다면 그것도 그 당사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는 그 사실에 억울해할 수도 없으며, 그런 감정도, 생각도 가질 수 없다. 쉽게 말해 그는 달콤한 꿈 속에서 삶을 마무리한 것이다.
문제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나는 현재 내세가 없다고 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즉, 죽음 이후에 다른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생애 중에 나의 희망들을 모두 이루어야 한다.
내게는 죽음의 시간까지 설정된 스톱워치가 지금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중인 것이다.
만일 내가 죽기 전 나의 꿈들을 이룰 수 없다면, 내가 지금 겪는 고통과 시간 낭비들은 고스란히 필요가 없어지는 쓰레기와 같을 것이고, 내가 다음날 눈을 뜨며 살아갈 이유조차 모호해지며, 당장에 여러 것들을 그만두고 해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 떠나야 그나마 나의 인생에 논리적인 당위성이 성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향해 뛰어든다고 그것이 완벽히 내 기준에 들어맞을 확률 또한 경험적으로 희박하다.
그것은 나의 노력 외에 아주 여러 요소들의 도움이 각각의 필요한 타이밍에 들어맞아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나, 돈을 아주 많이 가져 그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일 따위의 것들 말이다.
이에 대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은 마치 몇 해 전 유행했던 욜로(YOLO)족을 연상케 한다.
욜로족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나의 행복을 구가했다. 그들이 추구하던 것들은 마치 틱낫한 승려가 말했던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행복하라는 말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현재 삶의 방식 역시 인생을 통으로 본다면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내세 후에 소망을 둔 일부 개신교인들이나 무슬림과 비교하면 나는 이 생에서 당장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날로 곳간이 바닥나는 것처럼 보이는 국민연금을 묵묵히 붓는 것에 동의하기보다, 당장 그 돈을 납부하지 않고 쌓인 돈들을 인출하고 싶은 사람들과 같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당장 나의 행복을 위해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며 세상이 주입하는 모든 외침에 귀를 닫고 나의 꿈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일이 펼쳐진다.
태어날 때부터 가느다란 실로 묶여 있던 나의 국가(국적), 사회적 역할과 가족(부모, 아내, 아이)들은 나의 꿈의 실현을 방해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펼쳐지는 것이다.
국가는 시장경제체제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채택하여 수많은 인력꾼(노예)들을 양산했고 심지어 경쟁시켜왔다.
이 경쟁의 시스템에서 제발로 걸어나오거나 도태된다면 국가가 주는 아주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과 물을 얻어 근근히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 관한 두려움과 막막함은 용기로 극복해본다고 가정해보자.
나만의 꿈을 펼치는 삶에 있어 나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가족의 그물은 꽤나 심각한 힘으로 나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린다.
이 역시 내가 국가가 정한 하나의 시스템인 결혼 제도에 승낙하여 제 발로 그물로 걸어간 나의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랑했기에 결혼한 죄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나의 이같은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볼 몇 명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나를 외동으로 낳고 키운 부모야 나의 인생 걸음에 결정권이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고르고 결정한 아내와 아이는 나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 역시 내가 훌쩍 떠나버린다면 그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분명 그들의 삶에 구멍과 충격이 있을 것임은 확신할 수 있지 않는가.
때문에 나는 가족의 구성원들을 안고 책임지면서도 나의 행복을 실현시켜줄 방안을 골똘히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챙김과 동시에 나의 행복을 아주 일부분 쪼개어, 아주 일시적으로, 그것을 그저 혀 끝의 맛보기만으로도 경험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모아두고 있는 재산을 다소 소진해야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시간적, 그리고 내가 떠나 있을 공간의 형태로도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내가 현재 종사하는 일을 중단해야 하며 그것은 내가 경험하고 온 후 재시작하거나 되돌리기는 힘들어지며, 나는 외벌이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그들이 생활할 또 하나의 큰 지출이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지출은 지금껏 가격이 치솟아 내릴 줄 모르는 내 집 하나 마련하는 계획에도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가뭄같이 쩍쩍 갈라져 있는 상황에 그나마 '말이 되는' 시나리오가 하나 존재하긴 한다.
현재의 내가 가진 지식과 나의 상상력, 그리고 나의 뇌의 용량과 역량으로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영위하는 사업이 갑자기 규모가 커져 돈이 많이 벌리거나 복권에 당첨이 되어, 어떠한 형태로든 재정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직원을 더 고용하여 그에게 일을 맡기고, 아내와 딸에게 양해를 구한 채, 내가 품었던 마음 속 꿈을 그저 '흉내'라도 내어 보기 위하여 스위스 등지로 여행을 다녀올 것이고, 여러 개의 음악 장비를 구입하며 강남에 위치한 프로듀싱 학원에 등록한 뒤에, 주택을 새로 계약하여 소음 걱정 없이 작곡을 독학하며 음악을 만들어보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끝이없는 자전거길을 달리며 여러 가지의 삶의 형태를 고민했다.
첫째, 이 세상에서의 수많은 희망을 접고, 종교라는 달콤한 꿈에 빠져 그 모든 희망을 죽음 뒤로 던져버린 후, 속세에는 미련없이 고난을 감내하며 산다. 현재의 삶에서도 모든 좋은 일들은 신의 도움으로 인식하고, 모든 고난은 내게 필요한 시험이나 내세의 보상을 얻기 전 마지막 장애물이라 생각하며 힘을 얻을 수 있다. 대신 현재의 꿈들은 다른 소소한 것들로 대체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며 현실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질 것이므로 삶은 이전과 똑같거나 활동성이 더 적은 규모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물론 가능성일 뿐 미래가 더 나빠질지, 좋아질지는 미지수다.
둘째,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라는 욕을 들으며 나에게 얽힌 모든 줄들을 끊어버리고 내가 현재 가진 재산을 들고 제 3의 곳으로 떠나버린다. 나는 부모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할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최악의 남자로, 어떤 이에게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며 어긋나고 깨져버린 남은 인생을 선물할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떠난다고 하여 나의 미래가 내가 원하는대로 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의 형태로 남아 있다.
셋째, 애매한 형태로 나의 희망을 살려둔 채 지금의 삶을 이어나간다. 현실의 절망과 어려움은 지금껏 해 왔듯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상상으로 덮어버리며 1년, 2년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추어 어기적 어기적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옮긴다. 나의 행복은 아직도 먼 신기루이며 오로지 잭팟이나 나의 코앞에 있는 현재 상황이 나아질 것만을 동앗줄 붙들듯 간절히 매달리며 살아간다. 나이는 한 살 한 살 더 먹게 되고 나는 내 근처의 중요한 관계들을 이어 가며 살게 된다. 그러나 문득 드는 이 삶에 관한 괴로움은 필연적인 것이다. 역시나, 미래는 미지수다.
어떠한 삶의 방식을 택하든 미래는 미지수라는 수식어가 뒤따라 온다.
만약 미래가 확고히 정해져 있는 선택지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그곳으로 바람을 따라 갔을 것이다.
유일하게 확고히 정해진 하나의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미래가 불분명하다는 것 뿐이었다.
희망이 아무리 좋은들, 내가 1년 뒤 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면 어떨까?
그 때에야 나는 아마 내 꿈을 닮은 여행이라도 시작할 것이다.
나는 어쩌면, 사람이 그나마 현명해지는 방법은 착각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 전 억만장자를 꿈꾸고 있었더라도, 오늘 죽게 된 사람은 그 꿈에 한하여 만큼은 '착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돈을 꿈꾸는 그 모든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그가 원했던 액수만큼의 돈을 기어코 거머쥔 사람만이 착각을 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것인가?
애초에 우리는 미래를 모르게 태어났으니 현명해질 수 없다.
우리가 미래만큼은 현명할 수 없다고 자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래를 모르니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미래를 모르니 서둘러 생을 마감해야 할 이유도 없다.
미래를 모르니 허구적인 색이 짙은 종교를 억지로 가지거나, 허황된 꿈을 좇아 살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생겼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면
생의 마지막날까지 그것을 위한 가능성을 점점 높여갈 행동들은 취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도들, 노력들 중에 어느날 비명횡사하여 꽥 죽어버릴 수도 있다.
혹은 그것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병을 얻어 모아둔 돈을 다 소진하고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러한 시도들 중에 한날 한시에 죽어버렸다면, 그것이 덧없고 가치없는 삶이었을까?
애초에 그렇게 칭해지든, 말든 죽은 사람(나 자신)은 상관이 없다.
서두에 말했듯이 죽으면 내 인생에 대해 그렇게 가치판단할 수 조차 없이 블랙아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나의 '영혼'이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떠 다니며 내 인생을 판단할 수 있다고 쳐 보자.
그래도 우리가 죽은 뒤의 그 영혼의 형태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불쌍했던 나의 인생을 되짚으며 꺼이꺼이 며칠 울면 그만이다.
단 그러한 노력들이 나를 죽이지는 못하고 내게 긴 기간동안 병과 괴로움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건강했으나 성인이 된 뒤로 병원치레를 많이 하며 한 가지 느낀 것은, 병마와 싸우는 것은 숨이 붙어있는 한 그 괴로움과 고통이 지속되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동화 속 이야기처럼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성장해야 할 것이 있거나 수행해야 할 것을 마치 단기간에 해 주는 속성프로그램과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강신주 박사님은 어느 날 수척해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시고는 말과 손을 벌벌 떨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아픈 것에 큰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 아파보면 인간이 다 적응하고 그런다. 별 거 아니다.'
건강하셨을 시절 강연 중, 농담으로 늙어서 병에걸려 누워있을 때 간호사도 꼬실 수 있을만큼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다는 한 마디가 생각나며 그 말엔 더욱 힘이 실렸다.
좌우간 미래를 알지 못한 채로, 어떠한 관련성으로든 꿈을 향해 촉수가 뻗어있는 여러 형태로의 노력들이,
그것이 설령 지금은 꿈과 관련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저 매일같이 똑같은 회사나 알바에 출근하는 일일지라도,
혹은 매일같이 같은 책을 펴고 펜을 들어야 하는 시험 준비라 할지라도, 미래를 알 수 없는 똑같은 육체 노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엔 국가가 양산해 내는 노예의 일원이 되어 자본주의나 경쟁에 굴복하는 것 같이 여겨질 때에라도,
나의 한계와 나를 좀먹지 않는 그 기준 내에서만 계속 된다면(사람마다 각자의 한계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그 모든 이들은 '희망'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드라마 속 연기자들이 짜여진 각본의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드라마를 본다.
그 표정에 몰입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스토리를 따라가며 과거를 떠올린 채로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나도 이 모든 시도들이 그저 한낱 날개짓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각본은 내가 모르는 곳 어딘가에 짜여 있으며, 내가 현재 상정한 행복의 기준에 도달할 사람들은 정해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자주 한다.
극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큰 돈을 거머쥔 사람도, 모든 것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검붉어진 하늘을 뒤로 하고 집에 도착하여 자전거 자물쇠를 묶어 매달며 세 가지 중 마지막 형태로 일단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단, 무엇이든지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없으니 첫 번째의 형태도 섞어가며 살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씨부터 온갖 질병과 사고들에 손 하나 까딱할 겨를 없이 당하고만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내세가 존재할 가능성 또한 미지수인데, 이를 의도적으로 없다고 단정짓고 산다는 것은 손해가 아닌가?
때문에 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며 사는 것 또한 내게는 맞지 않다. 나는 신이 있다면 그가 주저없이 허락한 것들은 취해가며 살고 싶다.
허나 그 존재가 내게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하거나 터무니없는 것을 갖다 바치라고 할 경우에는 눈치를 보며 시간을 달라고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과 이십 대의 절반을 그것에 속아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으며, 주로 그것들은 사람을 통해 요구되었다.
애초에 신이라면 나의 현 상태와 필요를 충분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허락하는 것들만을 감사하게 받겠다. 그리고 그 받은 것들을 주변 보이는 이들에게 나 역시 무료로 허락하여 제공해주겠다.
나는 오늘도 애매해보이는 삶을 택한다.
가족도 챙기며, 나의 꿈도 버리지 않으며, 애매하게 신도 믿는, 이전과 똑같은 삶이다.
사실 오늘의 생각 또한 지루한 일상에서의 탈출이었을 뿐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단 하나, 알고 있는 것은 삶은 그 누구도 알거나 답해줄 수 없는 미지수라는 것이며,
나는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이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그러나 나의 한계를 넘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면서,
매일 하던 일들에 조금의 심호흡을 더하여 여유를 만들어 즐기고, 희망은 마치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한 동앗줄처럼 놓지 않으며,
하던 일들을 계속하려 한다.
우리는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드라마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