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다.

나는 나의 자신을 돌보며 살기에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비단 육체적 에너지 뿐일까?

우리에겐 정신적 에너지도 있다. 

 

'정신적'이라는 형용사가 비단 뇌가 위치한 두개골 쪽에만 관련한 것일까?

마음을 쓰게 되는 것, 안절부절 하게 되는 일들, 감정의 소모와 낭비, 은근한 기싸움 등 하루를 거치며 부지불식간에 수없이도 지나가는 과도한 심리 작용들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체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체력이 딸려.",  "예전 같지 않아."

신체적 에너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릇의 크기가 크고, 깊이가 있으면 소중한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과하지 않은 운동, 땀이 몰래 났다가 바람에 식을 정도의 사뿐사뿐 걷는 행위 등은 좋다. 등산도, 수영도 좋은 운동이다.

그러나 과한 모든 것은 상응하는 반작용을 반드시 가지고 온다. 근육을 무리해서 키우는 이들 중에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은 육체의 관점으로 보자면 운동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열 배는 더 중요할 것이다. 옛 고승들은 끼니에 밥 두어 숟가락만을 먹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체력을 보였다.

하지만 중생들의 삶은 피곤하다. 먹는 것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식사'라는 문화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먹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온갖 나쁜 음식을 제한하고, 술 등을 입에 대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이 나라에서 온전히 나의 몸 만을 위하여 먹는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면,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거나 심지어 이기적이라는 표현도 들을 것이다. 이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숲 속의 산사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평범해야 할 우리네 삶에서는 그저 콩기름류의 사용을 금지하고, 밀가루 등의 섭취를 최대한 절제하며 현재까지 발전한 영양학적 지식에 따라 균형잡힌 식사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 마음과 관련하여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수련(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소식(小食)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 에너지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로서 그 중요도가 신체에너지와 비교된다.

그릇 자체(신체적 에너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릇에 담긴 것은 그릇 자체에 비하여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릇에 담긴 물이 썩었다면, 그 물과 그릇 모두 어디에 쓰일 수 있겠는가?

 

뭇사람들은 1차적이면서 1차원적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 멀리 있는 것 보다 눈 앞의 것을 쫓는다.

그들은 당장의 눈 앞의 일과 사건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때문에 이 모든 난리와 전쟁통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기루와 같을 뿐 내 그릇에 담긴 물이 썩었기 때문에, 무엇을 첨가해서 마셔도, 우려 마셔도, 끓여 마셔도, 차갑게 얼려 마셔도 모든 맛이 똑같이 최악인 원리와 같다.

즉 뭔가를 받아들이는 나의 정신적 에너지 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같은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최대한의 데미지를 입히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 아까운 것들에게 내 에너지를 한 줌이라도 주지 말기를...'

 

운전하다가 나에게 이 문장 하나가 박히듯이 다가왔다.

마치 미지의 창이 열린 찰나에 바람과 함께 수많은 전단지들이 흩날리던 중에 내 얼굴을 덮은 단 한 장 같았다.

'저 아까운 것들에게...'  - 아깝다는 것은 나의 에너지가 아깝다는 말이다. 문맥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 같지만...

나의 본얼굴과 속내, 진심을 드러내 보일만한 가치 조차도 없는, 그 정도도 아까운 사람과 사건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 정도도 아까운 그것들에게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주는 것은 너무도 어불성설이 아닌가!

나는 그들에게 나의 페르소나(가면) 여러가지 중 하나를 꺼내 무도회장에 가는 것처럼 꾸미고 들어간다.

그들 중 영특한 이가 있다면 뭔가를 느끼겠지만, 열에 아홉은 대부분 아주 잘 속아 넘어가는 듯 하다.

나는 눈에 힘을 풀고, 속쌍커풀이 보이도록 흐리게 뜨며 나의 인상을 흐리멍텅하게 만든다.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에 마치 진짜 웃음이 터진 것처럼 코에서 소리를 내며 웃음보를 터트린다.

그들에게 잘 보이거나 맞춰줄 마음은 없다. 어린 시절에는 그들 중 몇이 겁나기도 했었다. 그것도 이제는 옛말일 뿐.

단지 그들이 웃으며 잠시나마 만족을 하거나 본인이 가치 있는 사람인줄 착각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내게는 즐거움이다.

이는 그들을 낮추어 본다기 보다는, 모든 사람과 일들을 평온하거나 조화롭게 흐르도록 놓아두고 싶은 내 특성에 기인한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답에 가깝다.

어쨌거나 나는 그 시간이 나쁘지 않고 이제는 즐겁기까지 하다.

 

어릴적에는 필연적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도 몸서리가 쳐질만큼 싫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과 있을 때 에너지가 소진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제는 그러한 마음 속 감옥에서 해방되어 나온 시기임은 분명하다.

그런 제3자들이나 사건들의 난이도 낮은 상황들은 내게 더이상 고민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3자가 아닌 가까운 사람들, 나의 마음을 주거나 비추었던 이들, 나와 끈적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 등은 아직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에너지를 한 줌이라도 주지 말기를!

나는 에너지를 뭔가에 뺏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내가 준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에너지는 아주 분명히, 내가 통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너무도 쉽다.

내가 깨어나 있으면 나의 에너지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시에 나의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면서,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도 잡아내는 그 상태가 바로 깨어있는 상태이다.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상태에서 나의 마음을 보고, 주변 상황까지 파악이 끝난 그 아이러니한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이후로는, 나는 모든 것이 쉬웠다.

그 상태는 내 영혼이 찾던 작은 오아시스였고, 마음을 지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보물을 지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아주 쉬우면서, 동시에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마음 속에 늘 상주해 있는 온갖 종류의 불안감, 어두컴컴하고 짙은 패배감, 비관주의, 낙심, 우울함이 비가 그치듯 그친다.

이 상태에서는 긴장이 될 법한 통칭 윗사람, 그 누구를 만나도 편안하고 올바른 자세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 

수 천명이 보고 있는 강단에 올라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업무를 처리하거나 기타 일을 한다면 능률이 오른다. 아픈 곳이 있다면 통증마저 이내 멈춘다.

이 외에도 말로 늘어놓을 수 없는 효과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수적 효과 때문에 깨어있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깨어있지 않다면, 나의 에너지를 나도 모르게 준다는 것이 너무도 심각한 일인 것이었다.

그것도 내게 있어 그만한 에너지를 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일에게, 상황에게 나의 에너지를 두 손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

신체적 에너지(체력)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는 한 줌, 두 줌 주다보면 당연히 고갈됨을 느끼게 된다.

신체 에너지는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면 충전이 되지만, 정신적 에너지는 당장에 충전할 방법이 딱히 없다.

잠을 자는 것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지만, 그건 마치 그릇에 가득 담겨있는 썩은 물을 조금 땅에 흘려보내는 것과 같다.

그 정신과 마음 상태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다 한들, 같은 반응과 반작용이 계속해서 괴롭힐 것이다.

 

정신적 에너지를 건강히 다시 채우려면, 새가 부서진 둥지를 수선하듯이 부지런함과 일정한 시간이 요구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서 나를 보고, 보는 채로 그 또는 그 사건을 동시에 지켜보는 것이다.

한 번 그 사람 또는 사건에 대해 가볍고도 간단하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것이 나의 에너지를 이 만큼 주어야 하는 가치가 있는가? 나의 에너지를 이만큼 쏟는다고 그 사람이 바뀌는가? 그 사건은 해결되는가?

그 일은 내 가꿔나가야 할 내 몸과, 인생과 행복에 비해 너무도 중요한 것인가?

그만큼 가치가 있고, 비싸고, 몸둘바를 모르게 소중한 것인가 말이다. 

 

사실 정답은 정해져 있고도 남는다. 

행복의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을 가꾸어 나감에 있어 그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아내나 남편도, 심지어 아이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가꿈으로 인해 충만해지고 여유로워졌을 때, 배우자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원리 때문이다.

 

하지만 깨어난다는 것이 그토록 쉽다는 사실에 크나큰 맹점이 있다.

그 어떤 자세나, 단계나, 시간을 요함이 없이 순간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쉬우므로 오히려 그 가벼움 때문에 까먹거나 안 하게 되는 시간이 늘어가게 되는 사실이다.

이 과정 또한 너무나 쉽게 이어진다.

미련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자꾸 알아채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뿐이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시포스가 타르타로스에 떨어져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징벌이 떠올려질 만큼 끝없이 반복적이다.

하지만 언제나 눈에 보이는 육신이 증명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1차원적인 육신(신체)이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때는 바로 이 때이다.

자신의 마음이 단련되어 가는 과정을 비유로나마 눈으로 확인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체의 어떤 부분에 끊임없이 매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 힘이 생기고 근육이 부풀어오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정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새가 둥지를 수선하듯 매일 지푸라기 한 조각을 부지런히 나르다 보면, 어느새 둥지는 촘촘하게 엮인 채로 수선되어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나에게 찾아오는 사건이나, 

매일 얼굴을 보고, 맞대며 살아야 하는 인간 관계가 있다.

좋든 싫든 억지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럴 때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있음이다.

내가 깨어나면 넓어지고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그 대상이나 사람에 호의를 베풀게 되는데, 이 과정이 아까울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잘못은 그 사람이 하고 용서는 내가 해주어야 하는 상황에도 오히려 쉽게 넘어가게 되거나 심지어 사과를 하는 척을 해야 할 상황도 생길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그것에 붙들려 에너지를 줌으로써 나의 리듬과 안정이 망가지고 잠든 의식이 되어 오늘 가야할 걸음을 못 걷는 것이 훨씬 아까운 일이다.

 

나를 가꾸기 시작하는 것은 여러번 말하듯 아주 쉽다.

시작은 신체, 몸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 편이 훨씬 쉽기도 하다.

몸과 정신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를 따질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육체와 정신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유기되어있다.

몸의 작용으로 정신이 맑아지기도 하며, 정신이 건강함으로 몸이 못해내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다만 표면이냐 본질이냐의 영역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의 다음 끼니의 메뉴와 양을 조절함으로써 새로운 한 걸음을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신체로부터 정신(마음)의 영역을 다시 돌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체를 가꾸지 않고 마음만 돌보는 것은 지속력에 있어 약점을 가진다.

예컨대 매일 마음을 다잡더라도 몸에 나쁜 음식이나 해로운 것들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주입하고 있다면 수행을 금방 그만두게 된다.

그러나 이조차도 정신의 깨어남을 유지한다면 자연스레 몸 또한 소중히 돌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