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제 타프티 상세 정리>

 

- 12장에서 24장까지 -

 

12. 변화하기

프레임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은 ‘변화’하는 과정이다. 
나는 점점 달팽이에서 반딧불이로 변화중인 것이다. 
내가 프레임을 비추는 순간, 내면의 빛이 나로부터 방출되기 시작하며, 내가 희망하는 사건들은 불나방처럼 나에게 몸을 던지게 된다.
나는 행동의 환상에 빠지기 전까지 앞을 바라보는 빛나는 생명체로 창조되었던 존재였다.
지금 잃어버린 많은 것들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성공적이진 않을 것이다.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마음 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는 의심 한 조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완전히 수선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연습은 내가 굉장히 능숙하게 현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기까지도 항상 필요한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노력해야 한다.
프레임을 성공적으로 비추기 위해서는 노력이 아니라 집중력이 필요하다. 긴장하는 태도는 절대로 금물이다. 단 몇 분간, 1분만이라도 집중한다.
노력을 하는 순간 나는 의도의 내부 중심을 쓰기 시작한다. 현실은 외부의도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근육에 힘을주거나 긴장시키는 것은 단기적인 의도를 활성화 시켰다는 뜻이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하는 것은 이미 일어나버린 실제와 싸우는 것이고, 모든 것을 나의 영향력 안에 두고 나의 식대로 하려는 나의 습관인 것이다.

땋은 머리는 별다른 노력 없이 아주 쉽게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저 땋은머리와 프레임에 집중하는 것. 그것 뿐이다. (근육은 쓸 필요가 없다.)
나의 과제는 “현실이 내 말을 듣게 만드는게 아니라,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현실을 거머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중심인 땋은머리로 그저 현실을 비추는 것이다.
나는 영사기인 동시에 관객인 셈이다. 뒤에서는 프레임을 비추고, 중심으로는 마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있다.
(아, 나는 영사기에서 프레임을 미리 골라 끼우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것을 확인, 관찰하는 관객이구나.

미간이 아닌 등쪽의 땋은 머리로 비추고, 미간(생각)을 놓아주는게 아니라 땋은머리부터 놓아줘야 한다.
‘무관하게’, 아무 관련 없다는 듯이 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바로 외부 중심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땋은 머리의 끝부분에는 나를 끌고다닐 수 있는 갈고리가 달려 있다. 
이제껏 시나리오가 나의 의식을 그렇게 조종하며 끌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갈고리는 내 손아귀에 쥐어졌으며, 나의 통제 하에 있게 된다.
이제 나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나의 갈고리를 직접 손에 쥔 채 현실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13. 메타력

이것의 원리는 현실이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무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저 프레임을 비추기만 하면, 그 프레임은 ‘스스로' 실현된다.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은 바로 현실을 선택하고, 관찰자처럼 한 켠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힘의 반대편에는 ‘메타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내가 거울을 볼 때, 거울 면이 존재하고 그 거울 속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나 절대 만질 수는 없다.
즉,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거울 반대편 세계에는 꿈의 세계, 영화 필름 보관소가 있다. 그 곳에는 완전히 다른 법칙이 있다.
영화 필름 보관소에는 무수히 많은 미래의 가능태가 존재한다. 미래는 거울 너머에 있는 것이다. 
현실에만 존재하는 일반적인 힘이 거울 반대편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거울의 반대편에서 그 세계의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메타력은 현실의 반대편에서 존재하는 힘이다.

거울의 반대편으로 어떻게 갈까?
현실은 물질적 세계, 거울 반대편은 비물질의 세계이다. 
내가 잠을 깸과 동시에 주의는 거울 너머에 있는 세계로 넘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주의가 물질적 마네킹(육체)에서 빠져나와 가상적 마네킹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주의는 곧 나 자신이므로 내가 옮겨갔다고 말할 수 있고, 가상적 육체와 물질적 육체 모두, 어느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하나도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주의가 어떤 육체에 들어있는지의 여부이다.
만약 주의가 현실의 실제 프레임 속에 있다면 나는 완전히 시나리오에 얽매인다.
하지만 주의가 거울의 반대편인 형상 프레임 속에 위치한다면 나 자신과, 다가오는 현실도 자유롭게 통제가 가능한 것이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주변상황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나 자신의 동기와 행동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현재 프레임 속에서는 나의 힘과 팔다리를 사용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통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를 위해서는 주의와, 의도와, 메타력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힘을 경험하기 전까지 그것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메타력 또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땋은머리는 메타력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서,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길러내야 한다. 
프레임을 비추는 행동은 메타력을 길러내는 연습임과 동시에 내가 필요로 하는 현실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14. 연극 흉내내기

내가 땋은 머리의 갈고리를 손아귀에 쥐고, 주의가 거울 반대편 가상의 세계로 넘어갔다면, 현실의 물질적 마네킹 또한 조종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거울 반대편에는 형상이 있으며 현실에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의 형상일 뿐이다.
물질적 마네킹과 실제는 엄밀히 따지면 그림자라기보다도, 형상이 구현된 것이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들은 오로지 형상 뿐이다. 형상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형상을 담은 프레임이 존재하는 거울의 반대편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 거울 뒤편에서 통제할 때 메타력이 사용되는 것이며, 현실의 힘으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 쪽은 연극이고, 다른 한 쪽은 흉내 낸 연극이다.
흉내를 낸다는 뜻은, 설정된 규칙을 어길 권리가 없다는 뜻이며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나리오는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객관적 현실이다.
나는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객관적 현실에 존재해야 하는 운명이며,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으면서 흉내 내는 것만은 가능하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이지만, 내가 순식간에 의식의 중심으로 들어가 거울의 반대편으로 갔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그곳에 존재하면서 내가 필요로하는 필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 내가 존재하는 필름을 거스르지도 않았고, 그 속의 연기로부터 도망치치도 않았다.
동시에 나는 사건의 한켠으로 슬쩍 비켜나 사건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규칙을 전부 지켰으며,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흉내내기 게임이란, 내가 살아난 등장인물임에도 생명이 없는척 하며 영화 속을 거닐며, 내 의지대로 필름을 바꾸는 것이다.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을 선택해가면서 새로운 시나리오를 시작할 뿐이다. 그 시나리오는 내가 원하는 결과로 안내해줄 뿐이다.
필름을 몰래 바꾸었음에도 존재를 숨기고 뽐내지 않을 것을 추천한다. 
나의 현존을 나타내지는 않으면서, 잠들어 있는 자들을 굳이 깨우지 말자.


15. 현존하기

영화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나의 ‘의식', 즉 자아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뀌지 않은 현실 장면 속에서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자기자신 안에 현존한다. 나는 다른이들과 구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주변 사건들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현존함으로 인해 나는 필름을 교체하여 다른 필름으로 갈아 탈 기회를 부여받았다.

나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중적이어서, 거울 바깥과 안 동시에 모두 있을 수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는 부재한 상태가 되며 무의식의 상태에서 완전한 시나리오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다.

생시에서의 현존의 상태에서는 다가올 미래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
다만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련의 사건(흐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인 ‘다가올 프레임’만을 정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시나리오는 통제가 불가능하지만, 영화의 필름을 바꾸는 것이라는 개념을 이해해보자.
나의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시나리오가 어때야 하는지 알 권리도 나에게는 없다. 나의 영사기에 목표 프레임이 비치면, 사건의 경과는 자동으로 전환된다.

목표 프레임을 그저 비추면, 결과적으로 최종 목적지에 다다른다.
우리는 가까이에 놓여진 필름부터 조금씩 자리를 이동하게 되면서 점점 더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진다.
나의 목표가 얼마나 복잡한지에 따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실현될 것이며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선택하거나 거스르려고 한다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사건의 경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고 해도 같다.
등장인물에 영향을 미치려고 해도 같다. 심지어 이것은 천한 짓이며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내가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것은 사건도, 사람도 아닌 궁극적 목표다.
나는 습관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할 것이지만, (목표에 프레임을 맞추는 연습을 계속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겠다.


16. 유용함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사건도, 사람도, 스토리(시나리오)도 아니고, 오로지 최종적인 결과(프레임)이다. 
목표프레임을 꾸준히 비추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내 계획에 꼭 맞길 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나는 그간 무의식적으로 최악의 현실만을 선택했고 그에  관한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최악의 현실을 맞이했다.(불쾌함을 드러내면 자동으로 최악의 현실이 선택된다.)
한 가지 단순한 원칙을 가지자. 모든 면에서 유용함을 찾는 것이다.
아주 사소하게나마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도 거기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일은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다.
삐딱한 태도로 고집을 부리는 대신 유용함을 끌어내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환상적이다.
바뀐 필름에서는 모든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필요한 순간에 멈춰서 유용함을 선택했으므로, 선택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유용함은 바로 내 것이 된다. 

잠에서 깨어나 나 자신이 보이고 현실이 보이는 현존상태가 된다.
여기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용함(이득)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동의하며 이끌어낸다.
답을 찾지 못해도 일단 동의한다. 타협한다. 거절했거나 삐딱하게 대처했던 것들을 받아들인다.


17. 허용하기

목표가 정해졌다면, 시나리오는 내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저절로 움직인다.
내 계획만 고집하는 행동은 방해가 될 뿐이다. 
“시나리오를 선택하지 말고 목표 프레임을 선택해야 한다.(비추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결과를 아는 것 / 땋은머리를 사용하여 언어와 형상으로 다가올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시나리오는 알아서 안내해준다.

마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사건의 시나리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시나리오는 나를 충격에 빠트릴 수도 있다. 이 때 나의 선택에 따라 유용함을 얻는 영화 필름으로 옮겨가는 타이밍이 된다. 심지어 목표를 향해 더 빨리 갈 수도 있다. 

유용함을 감시할 때 곁눈질로 현실을 슬쩍슬쩍 보고 있어야 한다.(무관하게 있는다는 뜻에 가깝다.) 시나리오든, 등장인물이든 나의 현존을 알아채도록 드러내지 말자. 잠든 자들과 마찬가지인 척 하자.
“주의를 가진 채 현존하며, 다가오는 프레임을 나의 의도로 움직여 필름을 바꿀 때 나는 살아 있는자로서 영화속을 거닐게 된다.”


18. 시나리오

“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에 대한 답변은, 내가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며, 현실을 선택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달팽이처럼.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나는 이성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시나리오는 하나의 필름에 있는 나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프로그램화한 것이며,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건'이나 ‘사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그릇된 행동과 부작용만 잔뜩 떠안게 된다.
시나리오도, 사건의 전반적인 흐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늘 상기하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에서 유용함을 뽑아내는 것과, 그 전에 목표 프레임을 선택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19. 창조자의 불꽃

사건의 흐름과 사람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싶은 것은 강력한 유혹이다. 
시나리오는 미리 알 수도 없고,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사람 또한 통제 불가능하다.
목표프레임을 선택하면 시나리오가 바로 나만을 위하여 움직이는 영화를 구경할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을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개선하며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내면에 창조자의 불꽃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배하려는 욕구(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현실과 내 자신을 창조하자. 영적인 측면에서 나는 이 어두운 세계에서 제때 주의를 감시하며 자신을보고 현실을 보는 반딧불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만 해도 나는 빛이 나며 주변의 모든 호감이 집중된다.
더불어, 현실을 선택할 뿐 아니라, 새로운 필름으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이미 현실 프레임에 깔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힌트이다.
“나와 모든 자들에게 유용함을!” - 나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달팽이들을 위해서도 유용함을 챙겨주는 것을 습관화 하자.

 


20. 힘의 지배

시나리오가 나를 통제하도록 허용하는 것  vs  내 자신을 움직여 오랫동안 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자신을 다잡는 것
오직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나 사건으로부터 뭔가를 계속해서 원하고, 그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강요하고, 바꾸려고 한다. (바로 어젯밤의 일 : 와이프로 하여금 아기 식단을 업그레이드 시켜줄 것을 이야기하다가 갈등이 일어남.)

나는 무의식중에 움직이지만, 동시에 의식을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항상 ‘어떻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략들을 수도 없이 세운다. 

이 때 내가 신경쓰는 건 목표가 아니라 목표를 어떻게 실현시킬지에 대한 어리석은 상상 뿐이다. 이 상상은 고집할수록 결국 모든 걸 망쳐버린다.
차라리 본능에 따라 이끌려 ‘어떻게?’ 라는 질문없이 시나리오에 이끌리는 동물들이 더 잘 산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보자. 목표만 생각한다면 시나리오가 알아서 목표로 인도해 준다.)
그저 자기자신과 주의를 감시한 채 시나리오의 힘에 순순히 따라야 한다.
나의 습관은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시나리오를 거스르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시나리오 자체를 거스르려고 해 왔었다.
생각과 의식을 가진 채 시나리오를 따르도록 하자. (내가 목표 프레임을 비추며 갈아끼웠다면, 시나리오는 그곳으로 안내해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에 고유의 불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도 밝게 빛나며 잠든 자들은 무의식중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그 외에는 눈에 띄지 말아야 하며 모두와 똑같이 영화의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
(시나리오를)허용하지 않으면 전부 망가진다.


21. 순응하기

반복적으로 강조하지만,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건의 흐름이나 사람들의 행동(태도)이 아니라 최종목표, 즉 목표 프레임이다. 
잠에서 깨어나 요상한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가진 채 순응하는 것에 더 가깝다.
오직 의지가 개입되어야 하는 부분은, 현실을 선택해서 필름을 바꾸는 일 뿐이다. 그 외에는 잠에서 깨어나 관찰하고 순응하기만 해야 한다.
시나리오는 강처럼 항상 최적의 길을 따라 흐른다.
목표를 분명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시나리오를 따라 흘러라.
순응한다는 것은 힘의 지배를 느끼고 그 힘에 복종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사건으로부터 뭔가를 원하고, 내 계획대로 흘러가길 바라며,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것 모두 통제하려는 습관이다.
잠으로부터 현존의 상태로 깨어나 ‘첫 번째 지배’에게 질문하여 답을 찾으면 그 지배를 따르고, 답이 없다면 목표 프레임을 선택하여 그것을 따르기 위해 시도하자.


22. 외부 힘

나의 위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일 뿐이다. 
시나리오 상에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건은, 내가 영화필름을 바꿔 다른 시나리오의 소유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우리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시나리오는 내가 현실을 선택할 때 나를 놓아주고, 내가 목표프레임을 비출 때면 갈아탈 새로운 영화 필름에 자리를 내어 준다.

나에겐 내부중심(이마)과 외부중심(땋은머리의 끝)이 있다.
주의를 가지고 존재하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때, 나는 살아있는 등장인물로서 영화속을 거닐게 된다. 
이 때 외부의도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에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땋은 머리를 나의 손으로 직접 쥐게 되면, 외부 힘에 메타력이라는 수동 소자가 생겨 내가 선택한 프레임으로 향할 수 있는 다른 필름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23. 종이인형

주의를 가지고 현존하지 않는다면, 마치 그림책 속 삽화나, 종이에 사람을 그려 오려서 책속에 끼워넣은 종이인형이 될 뿐이다. 
현실은 거울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보여주든지, 그것을 그대로 돌려준다. 주의를 거울(필름)속에서 끌어내면, 움직이고 통제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나를 둘러싼 실제는 생각과 행동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다. 
스크린 거울 앞에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움직이게 되면, 자신의 영화와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영화를 만들려면 첫째, 현존의 상태로 진입하여 영화 속에서 살아나라. 눈을 떠 주변을 다르게 바라보고 시선을 상쾌하게 해보라. 여러 색깔이 선명해짐을 느낀다.

둘째, 뭔가를 원하고 기대하기 앞서, “줘!”의 태도를 반대로 “가져"로 바꾸자. 내가 먼저 첫번째 행동을 취해야 한다. 마치 얻은 것처럼… 현실의 거울은 내 행동을 따라할 뿐이다.


24. 형상 선택하기

이 두 번째  행동(단계)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어떤 방법일까? 
예를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과 호의적인 대우를 받고 싶다면, 사랑을 뿜어내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
“줘.” 에는 (-) 표시가 달려 있으며, 실제로는 그 말의 뜻과 반대로 작동한다. 
모든 부정적 생각과 행동도 부메랑처럼 돌아 온다.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형상 알고리즘을 요약하자면, 
뭔가를 받고 싶을 때는,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현존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내어 바로 주고, 계속 주는 것이다.
형상을 정할 때의 기본적인 원칙은, 세상에 요구하거나 대가를 바라지 말고 먼저 애정과 관심(사랑)을 발산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