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곳은 나의 꿈 일기장 쯤으로 전락해가는 듯 하다.

 

 과거 꿈을 대했던 나의 자세는 '개꿈'이었다. 즉 밤 사이 꾸었던 모든 꿈에 개꿈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가끔 꾸는 꿈들을 이 곳에 동화처럼 남겨놓긴 했지만 나는 그 꿈에 대해 그 어떤 연결고리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혹 그것으로 나의 무의식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은 신기한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되어 연락이 끊겼던 사람에 대한 꿈을 꾼 날 그에게 연락을 받는다든가, 꿈에서 본 광경이 데자뷰처럼 현실로 일어났던 일 쯤은 간혹 있다. 이러한 경험은 보통 일반적인 사람도 인생 중 한 두 번은 겪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은 부모님의 지인 쯤으로 어렴풋 알고 있던 이가 두꺼운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 장면으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날 그 분의 오랜 투병으로부터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칼 융은 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하며 잠재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로 보았다. 나 또한 거울의 뒷세상과 무의식에 대해 차츰 알아가며 우리 인생의 1/3 정도를 담당하고 있는 수면 시간에서의 세계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게 아니라는 것만은 깨닫게 되었다. 고로 나는 내가 꾸었던 꿈들 중 생생하고 인상깊으며 그 날이 다 가도록 코에 진한 향기를 여전히 머무르게 하는 꿈들에 대해 다시 기록을 남겨두고픈 마음이 있다. 혹 시간이 흘러 그 꿈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축하함과 동시에 향후 해석에 있어서도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6월 3일의 꿈 - '물 속으로 나는 비행기'

 

 김광석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노래에서는 '물 속으로 나는 비행기'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하늘로 나는 돛단배',  '비오는 날 신문 파는 아이',  '한여름의 털장갑 장수',  '독사에게 잡힌 땅꾼' 등이 있다. 꿈의 세계는 이런 것이다. 꿈 속에서는 사과가 하늘로 떨어지고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아간다. 가끔은 나의 의지대로 고층 건물들 사이를 날 수도 있으며 차에 치여도 죽지 않는다. 

 

 그 날에 내가 탔던 비행기도 그런 것이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행운아로 선택되어 기장석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조종석 옆에서 비행을 지켜보는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기장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는데 유달리 그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는 단모 스타일의 머리와 다부지고 통통한 체형을 가졌으나 얼굴은 아주 선한 인상이었다. 키는 160cm대 정도로 되어 보였고 기장으로써 볼 수 있는 흔한 위엄이나 무게감 없이 우리와 편한 대화를 나눠 주었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지상 활주로를 조금 운행하더니 느닷없이 이어진 작은 호수 속으로 첨벙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거대한 기체가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방향을 천천히 돌려 물 위를 부딪힐 때 느꼈던 찰나의 무중력의 상태는 정말로 생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꿈 속에서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시대는 물 속으로의 비행이 가능한 시대였고, 활주로도 그렇게 이어져 있었으며, 그 기체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호수는 넓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수륙양용차가 잠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수면 위를 안정적으로 운행하고는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마치 잠수함처럼 기체의 전부가 물에 잠겼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조종석에서 약간의 물 속과 육지 두 곳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다. 다시 육지로 올라온 비행기는 본격적인 활주로로 가기 위해 아주 천천히 우회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비행 전 기체가 잠시 운행을 멈추고 모든 문이 열리더니 근처 주변 풍경을 사진 찍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다. 그 곳은 그저 황량하고 넓게 뻗은 활주로가 아니라 개울가, 호수, 꽃과 나비들이 즐비한 어느 숲 속의 활주로 코스였던 것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여러 꽃과 풍경들을 사진 찍느라 그만 탑승이 늦을 뻔 했다.  

 

 황급히 다시 조종실로 올라 타 문을 닫으려 하는데 문이 무거웠던 탓인지 닫는게 힘이 들었다. 그 사이 기장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천천히 운행을 시작했다. 나는 기장의 기준으로 오른쪽 맨 끝에 타고 있었고, 내가 닫아야 할 문은 스타렉스의 문처럼 밀어당겨야 닫히는 문이었다. 나는 기장을 부를 새도 없이 온갖 힘을 다 써서 문을 닫으려 시도했는데, 그만 기체가 서서히 달리며 지상에 있던 어떤 큰 소파에 문이 끼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문을 잡고 있고, 소파는 문에 걸려 비행기와 함께 이동하느라 문을 더 쉽게 닫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순간 급박한 느낌을 받은 나는 "사장님, 잠깐만요." 하는 말을 내뱉었다. 원래는 기장님이라고 불러야 맞으나 워낙 급했기에 단어가 헛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톤 만큼은 평소 성격 탓인지 차분했고 굳이 문장기호를 이용해 표현하자면 "잠깐만요!!!"가 아닌, "잠깐만요~"의 뉘앙스로 불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기장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이미 속도가 붙었고 상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기체의 속도를 이기지 못했던 탓인지 문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소파가 굴러 떨어져나가며 나는 한번더 엄청난 힘을 주어 문을 끌어당긴 끝에 가까스로 문 닫기에 성공했다. 나의 목소리에서도, 기장의 얼굴에서도, 심지어 내 얼굴에서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유독 나의 내면 속에서는 이것은 엄청난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고 느끼고 있었다. 

 

 비행기는 이내 하늘로 솟아오르며 꿈은 종료됐다.

 

 **(물 속을 첨벙하며 들어갔던 비행기, 숲 속으로 운행했던 비행기는 경비행기였던 것일까?

꿈 속에서 내가 인식했던 비행기는 우리가 흔히 타는 커다란 비행기였다. 

그러나 그런 거대한 비행기 내에는 보통 기장과 부기장이 탑승한다.

나는 부기장이 아니었지만, 부기장 자리에 대신 관광객의 시점으로 탑승해 있었다.)

 

 

    

 

6월 8일의 꿈 - 'A로 끝나는 이름'

 

 어제의 이 꿈은 단 한 장면만이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으므로 길게 기록할 것은 없지만, A에 대한 묘사 쯤은 다시금 해두고 싶다.

 

 A는 여성이며 나와의 인연은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다. A와 나는 고교 동창 관계다. A는 당시 나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어 접근했고 많은 편지와 선물을 주었다.(이것은 졸업 후 A가 나에게 직접 말해주었기 때문에 사실이다.)  나 또한 보답으로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당시 다른 여학생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이성적 호감은 가졌던 적이 없다. 

 

 A와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간간히 연락했으나 멀리 떨어졌으므로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20대 초반 시절 A가 나에게 다시 접근해 왔고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 사이였으므로 결론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때부터는 반대로 내가 A에게 호기심과 호감이 생겨 내가 연락을 자주 시도했다.

 

 그러나 A는 결국 거절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완곡하거나 혹은 직접적인 거절이 아닌 미성숙한 행태로 진행되었기에 나는 마음고생을 했었다. 이를테면 한껏 연락하며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처럼 행동을 취하다가 며칠 잠수를 타 버린다든지, 오래전에 잡았던 약속을 당일 아침에 취소하고 다시 연락두절이 된다든지, 혹은 전화 연결 시에 다른 이에게 전화를 받도록 하고는 모른체를 하며 시치미를 뗀다든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고 재미있는 어린아이의 장난 쯤으로 여길 법한 것들이지만, 당시 이십대를 막 진입했던 어렸던 나에게는 그 사건들이 굉장한 혼란이 되면서 여성에 대한 특성을 알아가는 데 적쟎은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 영향은 항후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결혼을 고민하던 시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나는 소위 '밀당'이라 칭하면서 상대방을 시험해보거나 거짓으로 연기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으며 그런 행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을 잘 만났고 결혼을 했다.

 

 오늘 A에 관한 꿈을 꾼 김에 평소 들쳐보지도 않았던 그녀의 몇 SNS 사진들을 어렵게 찾아봤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정신없이 사는 듯 보인다. 내게는 아직 그녀에 대한 나도 감지하지 못하는 증오심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융의 「꿈의 분석」 이라는 책을 보면 나와 비슷한 사례가 나오는데, 어느 남성 내담자가 가졌던 자기도 모르는 어느 여성에 대한 증오감을 인정하면서 꿈이 해석되고 물리적 통증에서도 벗어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현재까지도 그녀의 그 이상했던 행동을 용인하거나 이해할 마음은 없다. 졸업 후 그녀의 이해하기 힘든 접근과 반응들은, 고등학생 시절 내가 그녀와 수많은 소통을 주고받으면서도 다른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받았던 모멸감과 상처에 대한 복수 쯤으로 여겨질만큼 저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그녀도 나와 같이 어렸던 나이였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는 어느 정도의 스스로의 마음 정리의 첫 걸음은 할 수 있겠다고 여겨 본다. 그리고 또한 그녀에게도 나를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와 동기가 있었음을 헤아려 본다. 다만 졸업 후 모든 접근을 그녀 쪽에서 먼저 했기에 내게도 억울함이 남아있었던 것 뿐이다.

 

 어제의 꿈에서 그녀, A는 나에게 몰래 썼던 모든 편지와 작품들을 내 눈앞에 펼쳐놓았다. 그 편지들은 단지 네모난 편지봉투에 들어있었던 것들 외에도, 동그랗게 오려져 있기도 했고, 예쁜 별 모양으로 접혀져 있기도 했다. 그녀가 직접 만든 액세서리와 공예품들도 눈에 띄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했으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확실했던 사실은, 나와 그녀가 연락이 두절되고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 속에서 본인이 써 온 마음들을 수줍게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 대한 호감 표시이거나 만나길 원하는지의 여부는 열린 결말로써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장면만을 목격하고 한 마디 말을 건넨 뒤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의 나는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 A라는 친구와 다시금 모든 오해를 풀고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을 터놓고 공유하고 싶었을 만큼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는 서둘러 갈 채비를 하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