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신과 의사에게서 꿈은 곧 '배출' 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다소 맞다고 생각하는데, 꿈 속에서는 내가 평소에 잊고 있었거나 이 뻑뻑한 현실 탓에 자연스레 지워져 있던 감정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현실에서 더는 배설할 수 없는 꽉 막힌 감정들을 꿈 속에서 그 어떤 잣대나 사회적 편견, 그리고 죄책감 따위 없이 느끼고 누리며 배출하게 된다는 그 사실 말이다.
오늘의 꿈도 그랬던 것이, 나는 이제 더는 뭇 여자에 대한 설레임도, 그 낯간지러운 어투에서 느껴지는 아찔함도, 1초에 마치 수만번을 왔다갔다 하는 것 같은 셈과 계산 속에서 어렵게 영글어내어 꺼낸 한마디와 그에 대한 대답 - 그것은 단 1%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 사이에서의 묘한 긴장감들을 더는 느낄 수 없고 느껴서도 안 된다고 여기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0대이고 딸아이를 가진 아빠이며 사회적으로 체결된 아내가 있다. 나는 이들을 사랑하기도 하고 아끼며 하루 내내 가장 걱정하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 나의 지인들을 포함, 이 곳에서조차 그 사랑의 양을 가늠하여 나타내지 않고 그저 뉘앙스만 풀풀 풍기고 있는 이유는 훗날 아주 묘연한 확률로 내 마음의 무게가 진실로 나타나게 되었을 때의 사회적 지탄과 낙인 또한 하나의 이유가 되었겠지만, 그보다 나 자신, 스스로가 그 마음 속 감정을 아주 용감하게 맞서고 줄글로 쉽게 쓰는 것이 대단히 힘들기도 해서이다.
나는 어쩌면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새처럼 그 둥글고 좁은 벽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마저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새벽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일 테니까,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별개의 것으로 벗어나 벌어진 하나의 사건 중 하나로써 종종 이 곳에 기록해두었던 다른 꿈들과 다르지않은 종류의 것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남겨두길 원한다.
사실 이 곳에 기록된 그녀와 관련된 꿈이 몇 가지가 있다. 할머니 집에 같이 다녀갔다거나, 함께 걷다 잠시 자전거가게에 들른 사이 그녀가 사라져 버렸던 꿈이나, 함께 행복한 얼굴로 수박을 한 입 가득 베어물었던 꿈 등 그 그림의 종류도 다양하다.
오늘의 꿈은 애석하게도 앞 부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체취만은 아주 강렬히 남았다. 확실히 남겨놓을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나는 그녀와 아주 오랫동안 굉장히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나와 그 사람은 소위 하루 종일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라는 단어에서 잠시 떠오른다. 아주 많은 그림들이 말이다. 굳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니, 더욱 자명히 말해서 나는 그 사람과 단 한 번도 데이트를 해 본적이 없다만, 나와 함께 '데이트'의 명목으로 시간을 보냈던 많은 여자들과 그 곳의 풍경들이 생각이 난다. 한옥마을, 민속촌, 그 곳에서의 신기한 마술들, 전통놀이들. 돌담길, 아득히 서울 전역이 보였던 것 같은 낙산 언덕, 대구의 그 거리, 대전의 한 골목. 나를 뒤돌아 보았을 순간 눌렀던 셔터 소리. 연예인처럼 예뻤던 어떤 사람. 지나가던 거의 모두가 쳐다볼 정도로... 그리고 이별을 고함과 동시에 골초가 되어버린 나의 모습. 취기와 함께 더욱 사랑스러워져 갔던 얼굴들, 다 알면서도 속아준 손잡기 스킬. 하지만 더는 전진할 수 없었던 그 날의 미련 곰탱이같던 나. 화개장터와 진하게 여운이 남았던 한 장소.
사랑의 얘기를 여러분에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언젠가 나에게도 몇 달동안 애인이 있었고, 때때로 별로 마음에는 없었지만 키스와 뜨거운 사랑의 밤을 얻은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사랑했었다면 나는 항상 불행했을 것이다. 희망없는 사랑의 고뇌와 불안과 겁내는 마음, 또 잠 못 이루는 밤들... 그러한 것들이 이제 와서는 어떤 엄청난 행운이나 성공과 지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 헤르만 헤세, 『그래도 꿈꾸어야 하리』 p.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