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틈 사이로 작은 난장이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나는 한시간 전부터 풀밭에 누운 채 여기저기 떠다니는 구름들이 서서히 몰려오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은 그물과 같은 구름발을 만들어 푸른 하늘을 지나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땅 위의 물이 증발하여 비가 오는 어떤 현상의 계절과, 밀물과 썰물이 정지하고 움직이는 때가 있듯이, 모든 것은 규칙적으로 우리들 내면과 리듬 속에서 형성된다. 삶의 과정은 주기적인 순환을 나타내기 위한 수열(數列)을 계산해야 할 때도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내 인생 속의 어두운 물결은 어떤 규칙성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 정확한 날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한번도 계속해서 일기를 써 본적이 없었다. 그 날이 23일인지, 혹은 27일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날이었는지 난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나의 영혼 속에서 어둡고 거센 파도가 외적인 원인없이 때때로 일어나는 것이다. 

 세계 위로 그림자 같은 그늘이 덮쳐온다. 음악은 천박하고 기쁨은 가식처럼 떠돈다. 삶보다 죽음이 더 낫겠다는 우울함이 가득찬다. 이러한 우울함은 가끔 발작적으로 일어나는데 나는 어떠한 단념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름의 무리가 서서히 나의 하늘을 덮어버린다.

 마음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예감은 현실적은 밤의 꿈으로 시작되었다. 전에 마음을 기쁘게 했었던 사람들, 집들, 색상들의 소리가 의심스럽고 거짓되게 느껴진다. 음악은 마음만 복잡하게 할 뿐이고 모든 편지들은 비위를 뒤틀리게 한다. 그것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도록 강요된 시간은 고통이고 불가피한 상황을 창출해 낸다. 

 분노와 슬픔과 고발은 모든 것에 대해, 즉 사람과 동물, 날씨, 신, 두꺼운 책,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분노, 초조, 고발, 미움 등은 대상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그 대상을 떠나 모두 내 자신에게로 돌아올 뿐이다. 나는 미움이 싹텄을 뿐이고 불화와 추함을 세상에 가져왔다.

 나는 오늘 그러한 날들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그것이 고대하였던 순간의 안식임을 안다. 전에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나를 위해서 더욱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색상이 달콤하게 울리고 바람은 천천히 흐르며 빛은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 또한 나는 그것을 삶이 견디기 어려웠던 날들을 통해서 얻었음도 안다.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시를 쓰고 여행을 하는 것은 우울함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다. 마치 은둔자가 경본(경본)을 의지해 살듯이 나는 이러한 방법을 의지해 살았다. 나는 드물지만 가끔씩 행복한 시간이 있고 추함의 주위에도 아직은 약간의 선함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종종 좋은 시간이 증가하고 나쁜 시간이 사라지는 진전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어떤 최악의 상태에서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은 선과 악의 중간에 있는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지나친 선회나 고통은 더욱 나쁘다. 그러나 즐거운 순간의 희열을 위해서 더욱더 유익하다.

 불쾌한 기분이 점점 멀어져 갔다. 삶은 다시 달콤해지고, 다시 방랑은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하고 있다가 돌아온 날 나는 어떤 유쾌한 기분이 자리를 잡는다. 고통스럽지 않은 피로, 괴롭지 않은 체념, 나 자신을 멸시하지 않는 감사, 서서히 인생의 행로가 기쁨으로 충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다시 꽃을 꺾으며 지팡이를 들고 산책을 한다. 사람들은 다시 생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생을 다시 한번 더 참고 견디었다. 그리고 좀더 자주 견디어 낼 것이다.

 구름이 조용하게 움직이는 다채로운 하늘이 내 영혼 속에 투영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내가 이러한 하늘로부터 내 내면의 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분명 불가능할 것이다. 종종 모든 것이 그렇게 불확실해질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공기와 구름이 지닌 분위기, 색의 소리, 안개, 그리고 바람의 움직임을 나보다도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섬세하고 진지하게 관찰할 수는 없을거라고 자만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또 고민했으며 내가 자각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단순히 나의 내적인 생이 외부로 투영된 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우리 시인들은 동시대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과제이다. 그것이 격정적이든 감상적이든, 비탄조이든 재치가 있든, 혹은 비난조의 말이든지간에 그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걸음마를 해나가듯이 그것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