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청년들이 가져야 할 철학 _ 강신주 철학자 

Go! Inside (고인사이드) 주최 8월 7일 강연

 

실제 있는 그대로 보자는게 불교.
실제보다 과도하거나 비하해서 보고 적용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가만히, 마음을 내려놓고 본다면 각기 개성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스스로 각인되어서 색안경으로 자기를 보고 있다.

"우울" 이라는 얘기.
우울하다 우울하다
왜 우울하니 물어보면,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에 따르면 내가 더 우울하다.

인문학자 철학자는 불교를 좋아해요.
인문학자는 초월자에 대한 맹신이 없다.
인간이 고민하고 해결하고 실수하고 고친다는게 인문학
결정적인 시간에 신에 대해 자기를 던져버리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는 
그 고민에 대한 시간들이 필요가 없어지는 것
우리는 성숙을 믿는 사람들.

우리는 인간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불교, 종교적 제도 면에서는 기독교 흉내도 낸다.
하지만, 스님들이 저보고 성불하라고 한다.
부처 되라고.
당신은 완전자다, 부처다. 저한텐 심각한 얘기다.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한 인간, 인간 하나가 완전해질 수 있다.
신처럼 파괴력을 가지는게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선택을 하고, 실수했으면 고치면 되는 것. 그게 완전이다.


불교의 핵심은 자비 거든요.
사랑이다. 
사랑이 뭔지가 핵심이다.  
흉내내는 것 말고, 살아 내야 된다.
내 친구가 아프면 들쳐업고 병원을 간다. 실제적인 살아냄.
대불연 학생들은 이걸 알기라도 하기 때문에 만나면 따뜻하다.
'훈습'(熏習).

고깃집에 한참 앉아있다보면 고기냄새가 베듯이. 

그렇게 준비라도 된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오늘 강연 두 가지만 잡았다.

첫 번째는, 이게 아마 핵심일텐데, 어린애들은 나 아픈것만 안다.
성숙했다는 건, 남이 아픈 것도 안다.
남을 돕는다, 남을 사랑하겠다 생각한 사람은

그만큼 힘이 남아있고 운동도 하고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할머니를 업기 위해서는 그날 밥도 잘 먹어야 한다고.
꼬맹이는 지 아픈 것만 안다. 

성숙하면 타인 아픈것을 안다.
타인 아픔 아는 사람들이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경쟁의 논리에 들어가기가 만만치가 않다. 타인을 아끼기 시작하면.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모든 혁명에 들어가보면 이 한마디 밖에 남아있지 않다.
물을 아끼고 물고기를 사랑하니까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다.


나만 아끼던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더운 날 시원한 물을 나 혼자 마셨는데, 이젠 여자친구부터 줘야 한다.  
불교에서 '고'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입을 터는게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올라 왔느냐가 중요한 거다.
진짜로 이사람의 고통이 느껴지면 어떻게 잔인하게 굴까.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 자비가 된다. 불교의 모든 것들은 자비로 간다.

불교의 핵심.

행복은 마지막 남은 결과 같은 거다.
허벅지에서 뜨거운 감자를 뗐을 때, 뜨거운게 잠깐 가실 때 그게 행복이다.
나를 포함한 존재들의 고통이 느껴지면, 자비가 나온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외우면 뭐해. 그리 느껴져야 한다.
내 다리에 뜨거운 감자가 있으면 떼 내듯이, 저 사람의 다리도 그렇다면 빨리 달려가서 감자를 떼줘야 되지.
이게 자비다.
꼬맹이 하나가 집에 돌아왔다. 엄마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해.
밥도 못해놨어. 몰래 라면 끓여먹고 식은밥 먹으면 벌써 성숙한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혹여 내가 잘못하면 저 사람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큰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인연 이라는 개념.
동아시아에는 인과개념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서양은 세게 발달했다.
사법에서 재판할 때, 범죄자를 처벌하고 범죄에 대해 해결된 것으로 친다.
범죄자가 사회에서 받은 영향이 있는데, 온전히 그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서양은 인과관계가 강해서 생산품 공정되면 결과물, 끝이다. 그것만 본다.
인과로 협소하게 보니 문제도 많이 일어나는 것.

인과에 반대해서 출현한게 불교. 번역을 "인연"이라 했다.
나가르쥬나가 쓴 「중론」이란 책의 원문을 보면, "인"도 빠져있다. "연"만 가리킨다.
직접적 원인이라는게 없다는 것이다. 연만 얘기한다.
연기의 법칙. 연이라는 것들이 모든 걸 일으키는 법이다.
모든 일들은 뭇 연들이 화합해서 생긴다. 
눈사람이 겨울에 생긴다. 겨울에 아침에 일어나 나가봤더니 눈사람이 생겨있다.
눈사람은 왜 만들어졌을까? 연들이 화합해서 만들어졌다.
첫번째, 눈이 내렸어야 했다. 둘째, 꼬맹이가 만들었다. 셋째, 낭만이 많은 아버지도 필요하다. 나가는걸 허락했으니까.
기후도 맞아야하고, 여러 조건들, 수많은 연들이 하나라도 안맞았다면 눈사람은 없다.
시간이 흐르며 연들이 하나씩 하나씩 빠진다.   
연들, 조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유지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눈사람도 녹는다.  

만나는 사람도, 사랑도 모두 눈사람으로 봐야 한다.
모든 것들은 연의 화합으로 만들어진다.
마치 여러분은 언제든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많은 연들이 있는 걸 안본다.
이래가지고 무슨 불교도들이야. 있는 그대로 세상을 안본다.
내가 노력을 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아무리 사랑을 하려 해도 안된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절대 안된다.
꼬맹이는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먹어야된다. 꼬맹이 주어를 우리로 보자.
연들이 다 갖춰지지 않았을 때 나만 만들겠다고 해도 눈사람은 안만들어진다.
연들이 다 갖춰져도 내가 마음먹지 않으면 눈사람은 없다.
이 균형감각도 없으면 답이 안나오죠. 중도도 여기서 나오는데...


왜 모든 것들이 자기 탓인것마냥, 내가 하면 다 만들어져야 하는 것 처럼 오바들 하지 말자.
연이 화합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자기는 눈사람의 조그마한 조건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거든.

하지만, 이 작은 조건에 불과한 내가 빠져도, 눈사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 몫은 어디 까지인지 생각하는게 중요하다.
이게 불교가 가진 균형감각이다.
자기 뜻대로 안됐다고 속상해 하는 학생들 많더라. 
자기가 초월적 신인 것처럼, 혹은 신한테 기도하는 사람처럼. 

중론에 나온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인연화합(因緣和合).
나는 어떤 결과에 대한 작은 연에 불과하지만, 
작지만, 무의미하지도 않다. 
전체 결과물을 나혼자 만들지도 못하지만, 나 빠지면 깨진다.

 

이것을 알 때 인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QnA

Q: 기성세대들이 대학생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에도 허덕이는데, 정의와 같은 큰 가치의 실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A: 대학생이라는 것도 어떤 존재다.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
대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든 화이트칼라 양성소다. 
1,2학년 때는 나름 교양도 가르친다.

하지만 전공과목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떻게 하면 더 잘팔리는 나사가 될까 준비시킨다.
부모들, 기성세대들은 너희에게 투자해서 근사한 상품이 돼서 대기업에 팔려가길 원했던 거다.

이건 분명히 나쁜 자본가들, 기성세대들의 탓이고

선택한 여러분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안좋은 조건에서도, 아스팔트에서도 잡초는 자란다. 생명이 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널널하다는 말이다. 요 사이에서 꽃필 수 있는 조건이 있다.
사랑도 하고 여행도 하고, 사회가 무엇인가 고민할 시간도 있다.
심지어 이 시간에도 학원 다니는 애들을 보면 너무 슬프고.
나를 생존하려고 하는 것을 사회가 이기적이라 하면 안된다.
투쟁, 정의 안해도 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데 해야 가치가 있는거지.
그래야 자유다.
인간은 생명은 자유롭고 싶어한다.
아스팔트로 깔아놔도 그렇게 잡초는 자라잖아.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순간 잡초도 못자란다. 차들이 지나다닌다. 

산 옆에 국도 쯤 되는 아스팔트 길에, 잡초들이 자란다. 

Q 지적장애인들 돌보는 일을 하는가운데 우울해집니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똥냄새가 불쾌하지 않아야 돌볼 수 있다.
예쁜 병아리 같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
이분들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 너무 복잡하게 들어와서 힘든 것이다.
아까 (인)연에 대해 들었다. 속단은 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들면 갈수록 심해진다. 본인한테도, 돌봐야 하는 사람한테도.
억지로 하면 물리고 지치기 시작한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출 것.

Q 이유없이 감정이 우울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생각이 잘못돼서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것이다.
희론적멸(戱論寂滅), 우리의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것.
적멸은 고요해지는 것. 그것만 가라앉으면 해결이다.
우리의 생각 중에서 가장 문제가 뭐냐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미래. 미래.
좋은 영화관에 갔어. 내일 시험이 있다. 내일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그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화를 못 본다. 
옛날에 산사에서 소리질렀잖아. 지금 여기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근사한 영화에 빠져들면 내일 시험보는걸 까먹을 때도 있다.
근사한 사람을 만나거나, 근사한 음악을 듣거나. 내 모든 감각을 현재에 집중할 것을 찾아야지.
만약에 여러가지로 마음이 불안하다고 한다면, 더 강한 활동을 하셔야 한다.
생각할 틈을 안주는 뭔가를 해라.
놀이기구 중에 롤러코스터같은거 타면 생각으로 마음이 불안하지 않는다.
근사한 파도를 봐도 그런거 다 사라진다.
집에 있지 마시구요, 맑은 경치, 좋은 음악, 좋은 사람을 만나는 식으로 바꿔야 한다.
내일 일어날 것들을 걱정하는 사람의 특징은, 지금 재밌게 못 보내는 사람들이다. 100%다.
조선조 시대가 아무리 생생한들 내 머릿속에만 있다. 
세계랑 열리는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다. 
명상쪽은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닷가에 나가서 저녁 6시~6시반쯤에 석양 봐요. 커피 하나 들고. 

Q. 타인의 눈치를 과하게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과하게 조심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들 얼굴 보면서 저건 감자다 고구마다 하는 것이다.

감자 원 감자 투, 교수 감자, 상사 감자 지나가네. 
혼자 있을 때는 괜찮다. 하지만 수천명이 있을 때에도 혼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불교만이 아니라 유학에서 '신독(愼獨)'이라는 개념이 있다. 삼가할 신, 홀로 독 자.
천만명이랑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듯하고, 혼자 있어도 천만명이랑 같이 있는 듯 하나는 것.

중요한 건, 질문자의 바닥에는, 남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
아직도 베이비고, 남의 칭찬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좋은 방법은, 대중교통수단, 지하철, 버스 뒷자석에 있다가 내릴 때 "대한독립만세" 외치고 내려라.
그게 연습이 되면 상관이 없어진다. 

나중에 깨닫는다. '의외로 세계가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구나.'  
망가짐의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망가지는게 힘든 것이다.
망가지면 나 버릴까봐...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말이다. 망가질 떄 본인 옆에 있는 사람이 친구다. 
망가질 때 떠나는 애들은 나 이쁘게 살라고 만들었던 주범들이었던 것.
식당에서 밥 먹을 때, 패스트푸드점에 케찹을 입에 묻히고 계산하고 나와라.
자유로워진다. 본인 탓이 아니다. 
부모 탓이고 사회 탓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쪼려보고, 주눅드는 그런 공간에서 많이 살아온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표현을 빌려서 "하루 세번 망가지기".  
실수해도 된다. 사람들이 안하는 쌍소리도 많이 해봐. 욕하는 것. 
누군가 이상한 소리하면 얘기하고. 망가져도 괜찮다. 

Q 전공과 취업하려는 분야가 너무 다릅니다. 제가 원하는 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는데도 주변 이야기를 듣고 가끔 힘이 빠집니다.
A: 내가 원하는걸 하는데 남들이 하지말라 그러면, 힘이 빠지기 보다 오기가 생긴다.
힘이 빠지면 원하는거라고 볼 수 없다.
여자를 만날 때 누군가 그 여자에 대해 안좋은 얘기해서 기운이 빠진다? 오히려 화가 나지.

본인이 하려는게 내가 원하는게 아닌거다. 아직도.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 하는거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데 누가 박수쳐 주겠나. 진짜 내길을 가면 박수쳐줄사람 하나도 없다.
그래서 가족과 단절하고.. 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 그들이 원하는걸 내가 해줬으면 좋겠는 마음 뿐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 보자.  

Q 무엇이든 시작할 때 두려움이 많아서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내가 원하는걸 했는데, 주변에서 욕도 하고 칭찬도 할 수 있다.
욕을 한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그러면 겁나지도 않는다. 실패도 물론 생각하겠지만 겁은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꿀이 굉장히 먹고 싶었다. 집 한구석에 고이 모셔둔 꿀단지.

할아버지만 드셔야 할 꿀이라 안된다고 했다.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안 들키고 먹거나, 먹고 들켜서 맞거나.
먹었고, 맞았다. 뿌듯했다. 
내가 원하는걸 많이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시작이라 얘기했던 것이, 친구가 하는 것 선배들이 하는 것 나도 해보려고 하는건 아닌지.
내가 진짜 원하는게 맞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좋으면, 내가 꿀이면, 달달하다. 사실 실패 생각도 안 해.
'저거 꿀이다...' 하는 것. 그걸 시작해 보라.

일단은 시작하고 맞더라도 "달달했다." 눈물을 닦으면서 "먹길 잘했다." 할 수 있는걸.
꿀과 같은 사람이 있고 장소가 있고 일이 있다. 
덥석 시작해라. 일단 나중에 맞더라도 나는 덥석 먹었었다. 
우리는 먹고 본다. 먹었으니 실패는 없다.
공대 포기하고 철학을 갈때도 나에게는 철학이 꿀이었다.

 

몸이 안좋아지기 이전에 산행도 많이 하고 암벽도 탔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종주하면서 정말 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했던 방법이 뭔지 아세요?
"하나, 둘, 셋" 센 거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 "진보는 2보도, 3보도, n보도, n+1보도 아니다. 진보는 1보다."  

사회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만든다.
몇점 사이가 토익 통과고. 딱 나오잖아.
성공과 실패가 머릿속에 들어가있으면 여러분은 성공 아니면 실패겠지.
아스팔트에 핀 잡초가 성공한거야, 실패한거야.
성공이나 실패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내면화한다.
살아있다는 것 하나로 끝나는 건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성공과 실패는 나한테 없는 거다.
니들이 뭔데 성공과 실패를 갈음하냐. 내가 좋아하는 것 하면서 행복한데. 
내가 좋아서 자전거를 탔을 때, 넘어졌다고 실패인가? 
"쪽팔려... 하필 여기서 넘어지냐." 이 정도지.

성공과 실패 없다, 엄격하게 보면. 
우린 너무 많은 성적표를 봤다. 
남 눈치를 안보는데, 남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데 실패가 어디 있는가?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 사회에서 만들었고 평가들을 내린다. 
그것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시작이 있다. 
학원을 다니면 성공과 실패가 있는데, 그 학원을 안다니면 성공과 실패가 없다.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오늘 데이트 성공!" "오늘 데이트 실패!" 외친다. 만날 것인가? 
언제든지 난 너랑 같이 있어서 좋아. 라는 남자를 만나야지.
사회가 게임을 만들어 놓은 것 뿐이다. 성패가 어딨나 삶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 훌륭한 것이다. 
오늘 근사한 음식 먹은 걸로 행복한 것이고.
나중에 아이를 낳아도 성공과 실패로 아이를 보지 않아야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
반려견이 다리를 저는데 우리가 반려견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
성공, 실패는 자본주의라는 이 협소한 개념에서 나온 것.
자본주의가 아무리 경쟁을 심화시켜도, 우리 삶을 돌아보면 성패와 무관한 영역이 너무나 많고
그 영역이 우리 행복을 결정한다. 
성패의 개념으로 나나 세계의 사람들을 보지 맙시다. 

삼국시대 귀족사회 노예사회,
조선조 봉건사회도 참 힘들었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도 힘들지.
사회가 고통을 가중시키는 연들을 막 만들어내면
그래도, 연대하며 함께 행복해져야 한다.
선배가 됐으면 후배보다 더 배고파져야 돼.
그런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저도 똑같아요. 제가 많이 힘들면 뿌듯해진다. 
인간을 아낀다면 그리 해야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