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t to the Paradise

강신주.

이 분은 몇 안되는 나의 뮤즈(Muse)다.

나는 어느새부턴가 이 아저씨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8,9년 전 즈음.

역시 지금보다도 더욱 어렸을 때라, 이 분의 책보다는 강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분의 본업은 작가다.

글쓰는 사람. 아마 본인도 그렇게 불리우시는 걸 가장 좋아하실지도. 

슬프게도 나는 이 분의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책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지만, 강연은 그 때의 시공간에 박혀 그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같은 양의 희열을 체험할 수 없다.

요즘도 이 분의 옛날 강연(2011~12년도)을 틀어놓고 듣곤 하는데, 역시나 그 시절의 판타스틱한 그 느낌을 따라가기는 힘들다.

물론 이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어서일지도.

 

어떤 사람을 동경할 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수준으로 동경하며, 그 기간 또한 매우 긴 내가

오늘 이 글에서 강신주 박사님이 꽤 좋아할 만한 한 문장을 써 보겠다. 나는 이 분이 이 문장을 매우 좋아할 것을 알고 있다.

 

"강신주는, 강신주다."

강신주는 어느 누구로 대체될 수 없다. 강신주는 강신주이다.

강신주는 강신주스러움이 있다. 그 독특함은 너무도 개성적이고 희귀하며 절대로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다.

 

그가 마이크를 잡으면 그 만의 밀어붙임이 있다. 어느 강연에선가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은 강연장의 군중들이 파도처럼 자기에게 밀려든다고.

그래서 산행을 많이 한다고. 튼튼한 두 다리로 비석 마냥 버티고 서서 군중을 저 벽 끝까지 밀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의 강연은 정말 내가 밀리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 그랬다.

내 실존도, 인생도, 누더기처럼 기워 만든 내 가치관도 

모두 쓸려 나간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자각한다. 어디서부터 고칠지 감 조차 잡히지 않는 상태로 강연장을 빠져 나온다. 

희망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 편이 훨씬 좋았다.

나의 누추한 민낯을 낱낱이 비춰주었던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떳떳하지 못할 때와 떳떳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그를 직접 보고 싶어 강연장을 많이도 따라 다녔다.

군생활 중 휴가를 나왔을 때도, 꽤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전 여자친구와도, 때로는 죽음을 생각할 때,

늘 그의 강연장을 찾았다.

강연 후 사인회에서 쭈뼛거리며 요청해 찍은 사진도 몇 장인지.

나의 가슴에 손을 쓰다듬으시며 "네 마음을 따라가렴. 그럼 괜찮을 거야." 말하던 강신주 철학자.

강연 전 반바지, 슬리퍼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강신주 철학자.

 

얼마 전 화면을 통해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모습은 나의 눈을 의심케 했다. 

떨리는 손으로 물병을 힘들게 집어 마시던 그의 모습.

갖가지 헤어스타일을 구사할만큼 숱하게 차 있던 그의 머리카락도

오랜 산행으로 다져진 탄탄했던 근육과 풍채도

거침없이, 쉴 새 없이 몰아붙였던 말의 빠르기도

오랜 등걸처럼 굳세었던 목소리도

모두 줄어들었다.

 

사람은 모든 생물체와 같이 그 시작과 끝이 있다는 사실과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말을 언제나 간직하고 살아간다 여기던 내게도

그 모습은 놀라움과 충격 그리고 슬픔으로 다가왔다.

우선 언제나 그 분을 동경하며 멀리서나마 근황을 확인하던 나의 기준으로도 그의 변이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고, 급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헤어짐에 꽤 초연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강신주 박사님은, 아직은 더 보고 싶다는걸 깨달았다.

 

다음은 며칠 전 그리운 강박사님의 강연 전문을 요약한 것이다. 

 

 


 

 

책 쓴다고 몸이 축나서 건강이 바닥을 쳤다가 최근 살이 오르고 있다. 

좋은 작가들의 특징들, 
좋은 예술가의 특징들. 여리다.

객관화 시키면 합리화가 돼서 맘이 편해진다.

글쓰기도 일종의 객관화 작업.

자기가 제대로 알면 초등학생 시골농부앞에서도 설명 가능하다. 
창작을 한다는건, 허영이라면 안하는게 낫다. 
글쓰니까, 글쓰는동안 나의 아픔을 거리져서 저기 객관화 되어 있는거다. 
너무 힘들 때 쓰는거다. 너무 외롭다, 답답하다. 그럴 때 글을 써봐라. 
내 고통을 써보자. 유치해도 상관없다. 질투라도 상관없다. 
옆집 강아지가 죽어서 노벨상 나온다니까, 글쎄. 
내 고통이기 때문에 창작이 되는거다. 
때문에, 사람 수만큼 창작이 가능하다. 

시를 자기로, 나로 쓰면 되는데 
남을 흉내내면 창작이 아니라 표절이다. 
작가의 뜻. 시작 작, 처음으로, 창업의 창, 처음 시작한다는 뜻. 
앵무새가 아니라는 말이다. 

 

영어로 AUTHOR,

AUTHOR 에다가 ity를 붙이면 권위다. 
번역 잘못됐다고. Authority는 본래 "작가임"을 의미한다. "앵무새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힘든거야. 글 쓴다라는건. 
작가들의 작품은 원래 안 팔려요. 
진정한 내꺼면은 너무 특이해서 대개 대중성이 없다.  
진정 작가는 가급적 내용반복 안하려고 한다.


author라는것, 차라리 앵무새가 될 바에는 침묵하고 있을 것. 
왜 내 말을 아이들이 안 듣는줄 알아? 
앵무새 얘기니까.  
초나라 장왕이 했던 말.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 3년만에 우는 새는 천지를 진동시킬 것이다.

힘들어서 울고, 아무때나 울고.

그러면 무게가 없지.


저 사람 답다. 개성이 있다. 유행에 둔감해야 돼. 
그러면 AUTHOR이다.  
자식키울때도 AUTHOR로 키워라. 내 말 반복하는 사람으로 키우지 말고. 
자기 울음을 울 수 있는 아이로 키울 것.  
들판에 꽃들이 많아도, 다 진달래여도, 다 다른 진달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양도 다 다르다. 
우린 다 다르다. 나와 내 어미도 미세하게 다른게 있어. 
하물며 그런데 나와 내 아내가 같을 수 있나? 
짧게 얘기해도 내 얘기여야 돼. 
써온 거, 누가 써다준 거 읽지 말자. 

최근 광화문에는 뚜벅이 배달부 들이 많아졌다.

대부분 대학생 쯤 돼보이는 청년들.

생계가 보장되지 않으면 창작은 거의 불가능하다. 
창작과 창업. 굉장히 거리가 멀다. 
내 얘기를 하면 안 팔린다. 
니체 짜라투스투라, 초본 300부도 안넘었다.  
니체는 나름 대중서적을 썼다지만 작가임을 포기하진 않았던 것. 
생계가 충분히 확보됐는데도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맘이 있는가? 
회사에가서 부장, 팀장이 원하는 얘기도 못하는, 정규직으로 못 사는 아이들. 
직장생활은 앵무새가 되어야 한다. 안정도 준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앵무새로 살아가는 길 조차 막혀있다.  

근사하게 창작자로 속인 앵무새는 창업으로 갈 수 있다. 
창작자인 척 하지만 앵무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도 안다. 
그 사람 책은 안 사기 시작한다. 
창작으로 경제적 기초를 닦으려는 분은 굉장히 위험한 길을 걷겠다는 거다. 
작가는 이렇다.

나는 내 이야기 한다. 

3년, 5년 침묵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만, 냈다 하면 내 이야기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자기 소리 내기 힘들다. 
나는 인세 받으려고 글을 쓴적이 한번도 없다. 
힘들게 살았다. 내 이야기 하려고. 사람들, 어느 순간 들어준다. 
어느덧 강신주는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찾아오고 물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행복한 거다. 

자기만의 경험이 많아야 앵무새가 아니게 된다. 
창작은 매력적이다. 돈이 안들어와도 내 얘기하니까. 
그런데 돈을 벌려고 창작자인 척 하는 것은 힘들다. 
앵무새가 되지 말고, 
앵무새가 안 되기로 결정했다면 
삶 자체가 창작일거고, 만들어진 것도 창작일거다. 
만들어진거 절대 안나간다. 글도 세련되지 않고. 
계속 써라. 

애기가 처음에 어떻게 말을 하는가.

울다가, 웃다가, 옹알이 하다가. 자기 목소리 내는 거지. 

30대 중반, 후반에 가서 터질 수 있다.  
내가 50대 중반 지나가니까 배운게 하나 있다. 
자기가 원하는거 10년 하잖아.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10년을 냈더니 다 그걸로 먹고 살더라. 
하면 된다. 포기하는 건 자기다. 
내가 내 목소리를 냈더니 사람들이 안 찾으니까 포기해버린다.

 

나니까 낼 수 있는 목소리.

그러니까 내 글을 보고 그러니까 내 음악을 듣는거다. 
그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니까. 
그러면 작가가 된 거다. 
그러면 먹고 살 수 있다. 
논어에 '녹제귀중'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핵심은, 공자 선생님 밑에서 이리 공부를 했는데, 왜 우리는 관료가 되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에 
공자가 한마디 한 거다. "녹제귀중."

"너희가 공부를 하는 과정 그 사이에 봉녹이 있다." 
봉녹이 목적이 아니다. 
봉녹은 그 와중에 있다. 부수효과에 불과하다. 

어떤 작품이 만들 때 얼마에 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최대한 빨리 그 생각을 지워야 된다. 
창작과 창업에서, 창업은 녹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QnA 

Q. 박사님 2021년 목표는 어떻게 되시나요.

 

A. 정치역사철학 완강해야 한다. 백두대간 종주 중 중간즈음에 있다.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몸이 덜 축나겠다는 느낌. 
손에 악력 기르려고 야구공 넣고 다닌다. "한달 정도 더 쥐어보자." 하면서.  

Q. 건강하신가요.

 

A. 지금부터는 다시 움직여야 될 것 같다. 그 질문하신분 보다 제가 더 건강해요.

 

Q. 박사님 책의 E-book 계획은?

 

A. 나의 소관이 아니라 출판사와 이야기해보셔야 할 사항.

그런데, 오래 둘거면 e-book 으로 두면 안 된다. 좋은 작품은 물성이 있어야 돼.

 

Q. 사랑이 끝나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별은 언제 해야 하나요?  

A. 어떤 사람과 같이 있었을 때, '이 사람이 진짜 싫다. 헤어져야겠다.' 라는 것은,

여러분의 컨디션이 가장 좋을때도 헤어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대개는 내 삶이 너무 힘들어서 피곤해서 웬수로 보이도록 투영한다고.  
내가 너무 피곤하면 어떤 가족이든지간에 원수로 보인다. 
자기 삶이 힘들고 그것들 때문에 투사를 한다. 
나중에 후회한다. 그렇게 힘들게 해 놓으면 후회한다. 
보통 인연에 대해 생각할 때 그런 경우가 많다. 
사람이든, 직장생활이든 뭐든간에, 가장 피곤하지 않을 때에도 

웬수같다라고 느껴지면 헤어지면 된다. 
프로젝트 중에 헤어지면 안 돼. 

프로젝트 끝나고 좀 편해지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보면 된다.

 

Q. 자존감이 많이 낮아 고민입니다.

 

A. 나에 대해서 반성 많이 하지 말아라. 
타인과의 관계는 타인과 해결해야 돼. 
혼자 있으면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디비 자. 아니면 음악듣고 영화 봐. 
디비자고 있으면 되지.  
잠 잘자고 맛있는거 다 먹고 관계도 좋은 다음에 자살 한번 생각해보자. 
자살 아무도 안해. 

왜 엉뚱하게 자기를 투영할까.
혼자 있을 때 글을 한 번 써보세요.

그깟 것 때문에 이러고 있는게 보인다.

피식피식한다니까. 글 써봐. 
산양들이 설악산에 있는데, 저 높은 절벽 사이로 손바닥 만한 바위 틈새들을 뛰어다닌다고. 
잘못하면 떨어진다 하는 '생각함'이 없어서 그래. 
인간은 잘못된 생각을 먹으면 잘못된 길로 간다. 
우린 겁이 많다. 우린 산양보다 후지다. 
짐승들이 우리처럼 겁내던가? 

마음을 잘못먹어서 그래. 
책 많이 보고, 지혜로운 친구들이랑 대화 많이 하시고. 
사유가 강건해야 된다. 동물이 자살하던가? 인간만 자살한다. 
절망해서, 미리 무서워서. 


Q. 매일매일 하시는 습관이 있을까요?


A. 몸이 좀 회복기다.

아침에 일어날때 , '일어날 수 있을까?'

일어나서, '일어났네. 기쁘다.' 하며 산다.  
살 20kg 빠져봐. 웬만한 근육이 다 빠져서 못 움직인다.

지금은 올라와서 반 정도 이상 회복됐다. 
한달 정도만 있으면 다시 컴퓨터 칠 수 있다.  
하지만, 누워서 이렇게 있으면서, 혼자 지내니까. '못 일어나면 어떡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 혼자 버텨야 하는거야.

여러분은 누가 아프면 굉장히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 변화기만 잠깐 힘들지, 금세 다 적응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무튼 그런 생각들이 불현듯 아주 맑은 상태에서 지나간다. 

이것이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느낌은 아니다.

여하튼 지금은 몸은 달라져보일 수 있지만 정신은 굉장히 총명한 상태이고

여러분이 써 준 몇 마디 글들 가슴 속에 담아서 가지고 간다.

 

 


 

아직 나 조차도 강신주의 말을 가져다 나르는 앵무새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앞 뒤로는, 나니까 쓰는 몇 마디의 글을 적었다. 

요는, 난 강신주라는 사람을 매우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며, 그의 사유와 솔직함, 그리고 

삶으로 그것들을 살아내는, 그 몸소 증명해 보이는 모습이 이미 강신주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진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말 바꾸기나 치졸하게 덮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렇기에, 강연 시에 사람들의 마음 속을 파도처럼 헤집어 저 벽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당당함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욕도 하고, 날카롭게 끄집어 낸다. 때로는 낙관보다 비관을 택한다.

누군가 그 가운데 따뜻함을 엿보았다면 당신은 강신주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강신주 박사님은 우리와 똑같이 긴장하고, 두렵고, 컨디션에 따라 무서워 하기도 하며, 여린 면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수 차례 그 분을 직접 가까이서 뵈며 느꼈고 사실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우리들과는 다르다.

그냥 하고, 그저 시작한다. 

계산하지 않고 말하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정교하게 내놓는다.

 

용기가 있어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다.

뛰어내린 사람을, 우리는 용기가 있다고 부르기 시작한다.

 

12월의 어느날,

강연 말미 즈음이었다.

유튜브로 생중계 되고 있던 화면 속에

실시간 QnA 시간이 되어 모두들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꿈쩍하지 않던 내가

꼭 남겨드리고픈 한 마디가 있었다.

 

진행자 아나운서와 강신주 박사님은 담화를 마무리지으며 끝마칠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한 마디를 타이핑 하였다.

 

"박사님. 박사님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십니다. 사랑합니다."

 

끝인사 까지 마무리짓던 아나운서가 휴대폰을 힐끗 보더니, 꼭 읽어드리고 싶은 채팅이 있다며 읽기 시작한다.

"우리 구독자님들 중 한 분이 박사님. 박사님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십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하셨네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박사님은 그날 밤도, 오늘 밤도 광화문 집필실에서 혼자 계실 것이다. 

나는 거짓을 썼던 것일까. 

나는 그분의 곁에 가닿을 수 없다. 도와드리지도 챙겨드리지도 못 한다. 

그러나 진정 의미가 없을지라도, 설령 그 분께서 곧 돌아가실지라도, 나는 이 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몇 없는 귀중한 사람으로서 이 분이 아직 우리 곁을 떠나기엔 매우 아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장기로 들어섰을 때 삶을 가르쳐 주신 분,

강신주 박사님.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있다면, 작은 힘이 되어 날아가드리고 싶네요.

건강도 좋지만, 무엇보다 행복한 순간과 시절을 지나고 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