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둘.
나보다 두 살 아래다.
언제 이렇게 컸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내가 스물 둘, 너희가 스무살이었는데...
그런데 놈들은 아직도 애기 같다.
그 때도 애기같았는데..
한 놈은 교회 뒤 허름한 단칸방에 온 가족이 모여 산다.
"형 우리 집은 추워. 기름 보일러라 잘 못 켜......"
"나는 공기업 준비할거야..."
한 놈이 더 가관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발표가 내일 모레란다.
그리고 1년 째 대학원을 준비하며 고시원에 살고 있다고 한다.
고시원...?
나도 바깥 생활을 많이 해서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 칙칙한 냄새와 두 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 화장실에 보이는 물때와 벌레들, 옆 방에서 들리는 지퍼 내리는 소리...
너 괜찮아?
"형! 나는 얼마 전에 옆에 사는 아저씨랑 싸웠어..."
뭐? 무슨 일 있었는데...
"아니, 밤마다 아는 지인 불러다가 놀고... 너무 시끄럽게 해서 내가 저기요 조용히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했거든. 그런데 저기요.. 하는 순간 쌍욕이... 이씨, 저씨, 소새끼, 말새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냥 나왔지."
그건 싸운게 아니야 이놈아......
"형, 그런데 그 아저씨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애. 밤마다 우우우우... 하고 짐승소리를 내시더라구."
너 부모님께는 자주 연락 드리니?
"사실 내가 잘 안해서 부모님이 전화가 자주 오셔."
방은 안 추워?
"형, 사실 건물이 되게 오래 돼서... 정말 춥긴 해. 그런데 1년 사니까 이것마저 적응되더라."
중앙난방이야?
"응, 그런데 내가 일부러 창문 있는 방을 얻었거든. 원래 5만원 정도 더 비싼 방인데, 아주머니가 깎아주셔서 28만원에 살아. 그런데 창문이 있으니 춥네. 밤마다 외투 껴입고 모자 뒤집어쓰고 자."
식사는.
"원래 OO대 학식이 되게 싸잖아. 거기 가서 먹다가 너무 질이 안좋고 물리는거야. 그래서 몇 주 전부터 **기업 사내식당에 몰래 들어가서 먹는데... 외부인 식권을 샀는데도 앞에서 경비아저씨가 나를 막더라구. 한 번은 나보고 어디가시냐고 해서 그냥 전산직 직원이라고 했지."
아니, 그냥 식권 샀다고 하면 되잖아...
"그런데 당황하니까 그게 안 되더라구. 오히려 계속 캐묻는거야. 전산 어디쪽이요? 하면서... 그러니 나도 모르게 계속 거짓말이 나오게 되더라. 결국 경비아저씨가 아 콜센터 알바요? 해서 네... 그러고 내려갔어."
"형, 고시원에서 살면 너무 우울해지더라. 너무 답답해서 가끔 뛰쳐나가고 싶어."
잠시 느껴졌던 몹쓸 종류의 우월감과 안도감을 단숨에 잠식시키고도 남는 짙은 동정심이 나를 덮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들의 나이에 나 또한 최악을 경험했었다. 그 누구든지 나름의 최악의 순간을 지나온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다.
나 또한 쥐가 들끓는 하숙집에서, 날마다 방 벽을 두드리며 나를 위협하는 마리화나에 취한 사람을 피해 좀비처럼 살던 날이 있었다.
나 또한 이들과 같이 나의 꿈을 해마다 키워가며 그것이 나의 변신인 양 나를 둔갑시켰다.
나는 어느 해엔 경찰이었고, 또 다른 해엔 교사였으며, 잠시 감정평가사가 되기도 했다.
그보다 이전에 나는 의사이면서 한의사였고, 유명한 토크쇼의 MC이고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희들도 점점 알아가게 될 거야.
나의 꿈을 쳐다보던 시선에서 초라한 현실의 나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면
아마 태어나 처음 느껴본 정도의 씁쓸함에 처음에는 무조건 부정하게 될 걸.
그래도 자꾸만 틈새로 보이는 현실의 내 모습은
나를 포장했던 그 허무한 겉껍질에 균열이 가면 갈수록 더욱 잘 보이고, 나중에는 회피해도 부정해도 소용이 없어.
그 뒤에는 연습을 해야 돼....
꿈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나 자신을 한 번 쳐다보는 연습.
다시 꿈을 쳐다보고, 나 자신을 쳐다보고... 나의 마음이 놀라지 않도록 그렇게 이 시선 연습이 충분히 되면 어느새 나 자신만을 오롯이 보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견딜만 해질 거야.
어느 순간 무엇을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해지게 될 거야.
나는 오늘 내 가슴을 찢어놓은 이 두 놈들이 굉장히 밉다.
나는 이놈들에 비하면 진로도 결정되었고, 살고 있는 곳도 훨씬 쾌적하며 여유도 있다.
그런데 다시 한번 나의 행복은, 나와 관련한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들과 연결된 그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나는 오늘 매우 서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서른 즈음에'를 들었다. 어쩌면 기다렸었다. 서른 즈음에가 비로소 들릴 그 날을. 이제 서른이 되기 까지 두어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른 즈음에'를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