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인간의 지나친 욕망은 불순하고 비뚤어진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곳에서라야 비로소 우리의 관조(觀照)가 순수하게 되고, 사물의 영혼을 찬란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산에서 내가 벌목을 하고 사냥을 하려 하며, 저당권 설정을 해야 하는 산림을 바라본다면, 나는 진정한 산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계획, 그리고 경제적인 관계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내가 그 산림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푸른 심연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산림은 비로소 찬란한 산림이 되고 위대한 자연과 멋있는 경관으로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인간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공포나 희망, 욕구나 목적을 가지고 바라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는 다만 내 욕망의 불투명한 반영일 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는 가슴을 죄며 순전히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의문을 지닌 채 바라보게 된다. 즉 그에게 접근해 갈 수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쓸 수 있을까? 그는 예술에 대해서 좀 이해할까? 이와 같은 수많은 의문을 꼬리에 단 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인품이나 행동에서 모순되는 점을 낱낱이 파헤치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거나 심리학자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아주 어리석은 관점이다. 이러한 종류의 심리학에 있어서는 사이비적인 변호사가 대부분의 정치가나 학자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욕망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순수한 관조와 몰두의 경지가 피어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러한 때에 인간은 이용가치가 있다거나 위험스럽다는 것, 재미가 있다거나 지루하다는 것, 마음씨가 착하다거나 거칠다는 것, 강하다거나 연약하다는 것을 모두 중단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이 되며, 순수하게 관찰을 받고 있는 모든 사물처럼 아름답고 진지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관찰은 연구나 비판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관찰은 우리들의 영혼이 가장 드높게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상태이다. 즉 아무런 욕망이 없는 끝없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것이 몇 분간이나 몇 시간 또는 며칠이라 할지라도 ㅡ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ㅡ 그때에는 인간이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이때에 인간은 더 이상 우리들 욕망의 반영이나 전유물이 아니라, 다시금 순진무구한 자연이 된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추악한 것, 늙고 젊은 것, 선하고 악한 것, 개방적이고 폐쇄적인 것,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은 더 이상 상대적일 수도 없고 자로 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아름다우며 자기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어느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거나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떠한 것보다도 위대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면밀한 관찰을 해보면 모든 자연은 영원히 생성하는 불멸적인 생명이 변화하여 나타나는 형상이다. 이처럼 인간의 역할과 임무도 영혼을 서술하는 것이다. 영혼은 인간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동물과 식물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냐 하는 논쟁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혼은 곳곳마다 준비되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에게서 본연의 영혼을 찾고 있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자 괴로워하며 움직이는 가운데 영혼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과거부터 도구를 만들어 내고 불을 창조해 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던 것처럼 영혼을 발전시키는 것이 현재의 중요한 임무이다. 세계를 향한 순수한 영혼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특별한 역할이기도 하다. 이때에 전체적 인간세계는 영혼의 서술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과 암벽에서 중앙의 근원적 힘을, 동물에서는 활동성과 추구하는 자유를 터득하고 영혼이라고 부르는 생명의 형식과 표현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 인간이 수천 가지의 광채 중 어느 한 임의적 생명의 빛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빛으로 선택된 최종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모두가 영혼을 인식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깃든 인간의 예술, 그리고 영혼의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높고 신선하며 유기적 생명의 집결체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최고의 대상이 된다. 이 자명한 가치의 평가를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알고 있다. 나는 청년시절 인간보다도 자연경치와 예술작품에 더욱 가깝고도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는 수년 동안 공기와 대지, 물과 나무, 산과 동물들만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에 대한 꿈을 꾸고 지낸 적이 있었다.

 나는 인간을 평가할 때, 그들은 참다운 영혼의 궤도에서 완전히 멀어졌고, 욕망에 완전히 지배를 당하고 있으며, 거칠고도 야비한 동물처럼 원시적인 목적이나 추구하고, 잡동사니처럼 보잘것 없는 것이나 열망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에서 이미 배척되어서 최보해 가고 있으므로, 이러한 자연에서 그 길을 찾아야만 할 것이라는 잘못된 오류가 일시적이나마 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물질적인 것을 전혀 갈구하지 않는, 우연하게 서로 알게 된 현대의 보편적인 두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우리는 거의 육감적으로 두 사람이 각각 강요적인 분위기와 엄호하는 껍데기, 그리고 방어하는 보호본능에 잔뜩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닌 것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영혼적인 것으로부터의 전향과 의도, 그리고 공포와 소원들로 만들어진 그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란 것은 언급조차 되어서도 안되며, 엄습해 오는 공포와 수치의 울타리로 영혼을 완전히 둘러쳐 놓는 일이 필요한 것과도 같다. 이기적인 소망이 없는 사람만이 이 그물을 찢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물이 찢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영혼은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전차 안에 앉아서 젊은 두 사람이 우연하게 만난 인연으로 서로 인사하는 것을 주시해 보라. 그들의 초면 인사는 이상스러우며 거의 비극적이다. 그들은 낯설고도 차가운 태고적 자기 방어로부터, 얼음으로 뒤덮인 극과 극의 냉혈적인 모습으로 인사를 나눈다.

 나는 물론 말레이지아 사람이나 중국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유럽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무시무시한 오만으로 가득찬 불신과 냉대의 성곽 속에서 홀로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이 지껄여대는 말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그것을 외면적으로 관찰해 본다면 이는 영혼이 없는 세계에서 나온 석회질로 변해 버린 불가사의한 상형문자와 같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생겨 나오고 여기에서 부서져 나온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달라붙는 것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영혼을 표현하는 인간들은 정말로 드물다. 그러한 사람이 만약 있다면, 이는 시인보다도 더 위대하며 성인(聖人)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민족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이나 흑인이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는 보편적인 유럽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영혼은 사랑스럽고 친밀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찾고 원하는 영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런 소외감도 모르고, 신(神)을 빼앗긴 획일적인 세계의 고뇌도 모르는 그런 민족의 영혼은, 집단적이고 소박하여 약간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진정한 영혼은 아니다. 




 이제 전차 안에 앉아 있는 젊은 두 유럽인은 보다 더 친밀해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을 별로 표현하지 않거나 아예 내색조차 않는다. 그들은 마치 조직화된 의도와 계획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돈과 기계와 불신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 영혼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며, 만일 이 임무를 게을리하게 되면 병이 들거나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 그들이 소유하게 될 것은 잃어버린 어린 아이의 영혼이 아니라, 훨씬 더 섬세하고 더 개성적이며 보다 자유롭고 책임 능력이 있는 영혼이다. 

우리는 어린 아이나 미개인으로 되돌아가서는 안되며, 자기 나름대로 특출한 개성과 책임감으로 자유롭게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목적과 그 예감에 대해 여기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감지할 수가 없다. 

 그 두 젊은 사나이는 미개하지도 않지만 성인도 되지 못했다. 그들이 일상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그저 천천히 수백 번씩 만져보면서 벗길 수 있는 고릴라 가죽처럼 영혼의 목적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언어이다. 

 이 원시적이면서 조잡스럽고 더듬거리는 듯한 언어는 대략 이러하다. 

 '안녕하십니까?'하고 한 사람이 말한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 

 '앉으시지요.'

 이것으로 말해야만 될 것이 다 이야기 된 셈이다. 이 말들은 의미가 없다. 이는 미개한 인간의 순수한 장식용 형식이며, 이 말의 목적과 가치는 흑인이 코에다 끼고 다니는 고리와 똑같다. 

 따라서 그 의식적인 말들이 이야기되는 음조는 극도로 부자연스럽다. 그 말들은 정중함을 나타내지만 그 음조는 기분 나쁜 말들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쓴 탓인지 이상스럽게도 짧고 간결하며 절제적이고 차갑다. 여기에는 비난의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정과 어조는 차가우며 형식적이고 거의 병이 든 것 같다. 금발의 사나이가 '앉으시지요'하고 말을 할 때 멸시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위로 치켜든다. 그는 그렇게 느끼지는 않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영혼없는 교제를 수십 년 하는 동안 방어용 형식으로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영혼을 감추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혼이란 나타내 보이고 헌신할 때에만 성장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는 오만스럽다. 하나의 개성도 아니고 천진난만한 야만인도 아니다. 그의 오만이란 비참하게도 불안정하다. 

 그는 자기만을 위하여 튼튼한 벽을 쌓아야만 하고, 자기 주위에 방어와 냉정의 벽을 둘러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오만은 우리가 그의 미소를 얻어내는 순간에 파멸될 것이다. 

교양인들 사이의 교제에서 나타나는 신경질적이고 불안스런 음조는 병()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폭력에 대해서 달리 대항할 줄을 모르고 있는, 필연이면서 희망에 가득 찬 영혼의 병이다. 

 이러한 영혼이란 얼마나 수줍고 또한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이러한 영혼은 이 지상에서 매우 어리고, 또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영혼은 얼마나 자신을 감추고 있으며, 얼마나 두려움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제 두 사나이 중 어느 한 사람이 본래의 자기가 바라고 느끼는 바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는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거나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상쾌한 아침이군요. 모든 것이 꿈과도 같소. 나는 지금 휴가중이라오! 새로 산 이 넥차이가 멋지지요? 내 가방 속에 사과가 있는데 하나 드시겠소?’

 그가 정말로 이렇게 말을 한다면 다른 사나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과 감동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ㅔ서는 다른 사나이의 영혼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사과나 넥타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되는 것을 이유로 해서 우리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괴롭게 느끼지만 표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기계적인 방어수단을 강구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이를테면 우리가 쓰는 대용품적인 언어 중 어느 한 마디를 내뱉을 것이다.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네...... 흠....... 아주 좋군요’라고 하거나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고서는 완전히 모욕을 당한 듯한 심정으로 머리를 돌려 눈길을 멀리 할 것이다. 

 그는 자기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문 밖을 뚫어져라 내다보거나, 알 수 없는 많은 기호를 생각할 뿐 자기 내면의 기쁨을 결코 표현할 생각은 없다. 그는 추근추근하게 구는 사나이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고 고백할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 검은 머리 사나이는 정말 가방 속에 사과를 가지고 있고, 화창한 날씨와 자기 휴가에 대해, 자기의 넥타이와 노란 구두에 대해 정말로 어린 아이처럼 몹시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금발의 사나이가 ‘화폐 가치란 참 고약하거든’하고 말을 시작한다면, 그 검은 머리 사나이는 자기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아, 뭐라구요. 기분 좋게 지냅시다. 지금 화폐가치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고 외치지는 못하고, 근심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면서 ‘쳇, 그거 참 더럽군!’하고 내뱉을 것이다. 

 그것을 관찰해 보는 일은 참으로 이상스럽다. 그 두 사나이는 자신에게 무시무시한 강요를 자행하는 데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웃는 마음으로 한숨을 쉴 수 있고,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영혼을 지닌 채 냉정과 거절의 속임수만 쓰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관찰해 보자.

 영혼이 대화 속이나 표정에도 없고 목소리의 음조에도 깃들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느 곳에든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또 계속 주시해 보자.

 이제 그 금발의 사나이는 감시를 받는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가 차창 밖으로 멀리 뾰족뾰족한 산들을 바라볼 때, 그의 눈초리는 진실 그대로이며, 청춘과 동경, 그리고 뜨거운 꿈으로 가득차있다. 그의 모습은 방금 전하고는 반대로 천진난만하며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비난할 데 없는 다른 사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 얹혀 있는 가방을 손으로 받쳐본다. 그는 가방의 상태를 조사해 보고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 가방은 아주 안전하게 얹혀 있으며, 그런 걱정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그 검은 머리 사나이는 가방을 꼭 잡으려 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그것을 한번 만져보고 애정있는 마음으로 건드려보고 싶었을 뿐이다. 

 왜내하면 흠잡을 데 없이 실용적인 그 가죽가방 속에는 사과와 내의들 이외에 무언가 신성하리만큼 중요한 것이, 이를테면 고향에 있는 애인에게 줄 선물 같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자기로 만든 닥스 개이든, 편도(扁)가 든 과자로 만든 쾰른 성당이든, 아무튼 이 검은 머리 사나이가 현재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그의 꿈들이 사랑하고 신성시하는 것을 계속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싶은 것이다. 

 한 시간이나 전차가 달리는 동안 우리는 이 두 사나이를, 그것도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젊은이들을 관찰해 보았다. 

 그들은 이야기를 했으며 인사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고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로젓기도 하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조그마한 일들과 행동을 했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말은 물론이고 눈초리에도 영호는 없었다. 모든 것은 가면이었고 기계였다. 창문 밖으로 먼 곳의 푸르스름한 산림을 바라보던 신선한 눈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러했다. 


 


 이제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오, 수줍은 영혼들이여! 언제쯤 너희들은 수줍음을 박차고 앞으로 나올 것인가? 구원적인 체험 속에서, 약혼녀와의 결합에서, 하나의 믿음을 위한 신념에서, 행위와 희생 속에서 영혼이 나타난다면 그 영혼은 아름답고 거룩할 것이다. 폭력을 당하거나 어둠으로 뒤덮인 음흉스런 범죄와 잔학한 행위 속에서 영혼이 나타난다면 비탄스럽고 절망적일 것이다. 

 이제 우리들 모두는 생각하리라.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이 세상을 통해 이끌어 갈 것인가? 우리는 영혼을 제대로 잘 도와서 우리의 몸짓과 말에 투입되도록 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우리는 체념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새를 조롱에 가둬놓고 자꾸만 우리의 코에 고리를 끼울 것인가?

 

 그리고 당신은 느끼리라.

 

 영혼이 제지를 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괴테의 인간들처럼 이야기를 할 것이고, 하나하나의 숨결을 노래소리처럼 느낄 것이다.

 

 가련하고도 훌륭한 영혼이여! 그대가 있는 곳에는 혁명이 있고 영락한 자와의 대화가 있으며, 새로운 삶과 영적인 신이 있을 것이다. 영혼은 사랑이고 찬란한 미래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우리의 신적인 힘을 형식화하고 분쇄하는 사물이요, 소재일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서운 폭력이 행해지고 죽음이 광분하며 절망이 절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 뒤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는가!

 당신의 영혼에게 물어보라. 미래를 의미하고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영혼에게 물어보라! 그러나 당신의 이성(理性)에게 묻지는 말라! 세계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아가 찾지는 말라. 당신의 영혼은 당신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리라. 당신은 정치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한 일도 거의 없으며 적을 별로 증오하지도 않았고, 경계선을 별로 견고하게 쌓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혼은, 당신이 너무도 공포심을 지니고 도망질을 했다고 불평할 것이다. 당신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 영혼과 교제를 하고 함께 놀며 그 노래소리를 들을 시간이 결코 없었으며, 때로는 이 영혼을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유리한 이권을 위해 배반도 했다. 그리고 수백만의 인간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눈길을 어디로 돌리든 사람들은 노심초사하고 악의에 찬 얼굴들을 하고 있으며, 가장 무가치한 일이나 돈주머니, 그리고 요양소에 관계된 것 이외에는 하등의 여유도 없다. 

 영혼은 이 추악한 상태를 직시해 주는 핏속의 경고자이다. 당신의 영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나를 게을리한다면 당신은 노심초사해지고 생활에 있어서 적대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완전히 새로운 사랑과 주의력을 가지고 내게 몸을 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그러할 것이며 결국 그로 인해 몰락할 것이다.’라고. 

 또 한 시로 인해 병이 들고 행복에 대한 능력을 상실하는 자들도 결코 연약하다거나 가치 없는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며 미래의 새싹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수줍음에서 그릇된 세계질서에 대한 싸움을 기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일쯤은 진지하게 행할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 당신은 어느 한 교수님이 언젠가 이야기 한 ‘세상은 물질주의와 지성주의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 분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의 의사가 될 수도 없다. 그에게 있어 지성은 자기 파멸을 초래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몰락할 것이다.




 세상의 형세는 제멋대로 진행되어 가도 좋다. 그러나 의사의 협조자,  하나의 미래와 새로운 충동을 당신은 언제나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즉 학대바고 유연하면서도 파괴할 수 없는 불쌍한 영혼 속에서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영혼 속에는 아무런 지식도 없고 판단과 계획도 없다. 영혼에는 그저 충동과 미래와 감정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위대한 성인인 설교자, 영웅이나 인내자들이 이 영혼을 따랐고, 위대한 마술사나 예술가들도 이 영혼을 따랐다. 이 모든 사람들의 길은 일상생활에서 시작하여 성스럽게 드높은 곳에서 끝났다. 수백만 인간의 길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그 길은 요양소에서 끝난다. 

 전쟁이란 개미들도 하고 있고, 국가란 꿀벌들도 가지고 있으며 재산이란 생쥐들도 모으고 있다. 당신의 영혼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실패하는 경우나 당신이 그 영혼을 희생해서 성공을 하는 경우에 여하한 행복도 피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오로지 영혼만이 느낄 따름이며, 이성이나 돈주머니가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우리는 이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을 이미 오래 전에 한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했던 격언이 생겨났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이야기 된 것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인간의 격언이다. 

 ‘그대가 온 세상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대 영혼에 무의미하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