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가 가(家) 소년의 초상'


나는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어느 변호사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나는 일생을 통해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가 그녀 때문에, 다른 여자와의 만남을 얼마나 고민했던가 하는 것은 다른 기회에 말하기로 하자. 그녀는 레디 길타너라는 이름으로, 나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할 아름다운 여자였다. 


나는 식사하러 갈 때 거의 날마다 레디 길타너를 만났다. 열 다섯 살인 그녀는 날씬하고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었다. 갸름하면서도 발그레한 맑은 얼굴엔 정숙한 마음이 담긴 아름다움이 어려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얼굴의 세련미와 이전에는 할머니, 증조 할머니가 지니고 있던 아름다움이었다. 


이 명문가에는 대대로 정숙하고 기품이 있어 그 누구도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미인들이 많이 나왔다. 이름 모를 명장의 손으로 이룩된 '후가 가(家) 소년의 초상'이 있었는데, 그 초상은 16세기에 그려진 것으로써 내가 본 초상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길타너 집안의 여인들은 모두가 그 초상을 닮았고, 레디 또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만 그녀가 고요하고 정숙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에게서 꾸밈새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 어느날 저녁,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황혼 속에 앉아 있는 중에 그녀의 모습이 소년의 초상처럼 똑똑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상야릇한 기분이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면서 여린 나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 즐거운 순간은 잠시 후 사라져 버리고, 대신 쓰디쓴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녀는 나와 아무런 인연도 없고, 나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만나 본 일조차 없는 사이가 아닌가. 


내가 품고있는 아름다운 환영은 결국 그녀에 대한 도둑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가슴 깊이 느낄 적마다 비록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모습이 실로 절실하게, 언제나 나와 호흡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어둡고 뜨거운 물결이 내 가슴에 밀려와 손 끝으로 흐르는 맥까지도 야릇한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수업을 할 때나 장난질을 할 때에도 이 물결은 밀어닥쳤다. 그럴 때면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턱에다 괸 채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어가곤 했다. 선생님에게 이름이 불려지거나 친구들의 주먹세례를 받고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럴 때 나는 그 깊은 심연에서 빠져나와 꿈꾸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는 지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활기에 찬 호흡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빨간 지붕, 나를 둘러싸고 있는 푸른 산의 아름다움도 나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하였다. 나는 그것을 절실한 슬픔으로 맛보았다. 아름다운 것일수록 나를 받아주지 않고, 내동댕이치는 현실에서 모든 것이 소외로 느껴질 때마다 내 마음은 다시 레디 길타너에게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죽는다 해도 그녀는 그걸 모를 것이므로, 찾아와주지도 않을 것이며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녀의 눈에 띄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뭔가 세상에서 깜짝 놀랄 일을 하든지 그녀가 눈치 채지 않게 선물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실제로 나는 그녀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며칠 동안 휴일이 있어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갖가지 힘에 겨운 일을 많이 했는데 그것도 레디 길타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정복하기 어려운 산마루의 가장 험한 곳을 일부러 골라 오르기도 했고, 호수에서 보트로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저어가는 위험한 행위도 시도해 보았다. 살갗은 까맣게 그을었으며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쫄쫄 굶고 돌아왔을 때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견디자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레디 길타너만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과 그녀에 대한 찬미를 머나먼 산등성이와 아무도 밟지 않은 깊은 협곡까지도 옮겨갔다. 이런 모든 일은 교실에서 오므라들기만 했던 내 청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되었다. 팔뚝은 힘차게 부풀어 오르고 얼굴을 비롯한 온 몸뚱이는 까맣게 그을어 우람한 근육으로 단단하게 뭉쳐갔다. 


휴일의 마지막 날, 나는 그녀에게 보낼 꽃 때문에 고심했다. 여기저기 험난한 낭떠러지와 평지에 스노우드롭이 피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향내도 자색도 없는 은색의 꽃은 어쩐지 넋만 훔쳐간 것 같고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몇 그루 안되지만 석남꽃이 피어 있는 곳을 알았다. 간이 서늘해지는 가파른 낭떠러지의 움푹 패인 곳에 늦게 핀 꽃으로, 마음이 끌리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그쪽으로 건너간다는 건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꺾지 않으면 안되었다. 손등에 상처가 나고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목표에 도달했다. 아름다운 가지를 꺾어 손에 넣었을 때 디딜 곳이 마땅찮아 환호성을 지르진 못했지만 즐거운 나머지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되돌아설 때는 꽃을 입에 물고 절벽에 등을 기대면서 천천히 내려와야만 했다.


조심성이 모자란 내가 어떻게 그 낭떠러지를 무사히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산의 어느 기슭을 보아도 석남꽃은 벌써 자색을 잃은 때였다. 나는 망울진 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 있는, 금년으로서는 마지막인 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다섯 시간을 여행하면서 줄곧 석남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 마음이 아름다운 레디 길타너가 있는 마을로 향해 설레였지만, 높은 산맥이 점점 뒤로 멀어지면서부터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내 마음을 세차게 끌었다. 


나는 지금 그날의 기차여행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젠알프의 고개는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톱니같은 이웃 산들이 계속해서 아득히 뒤로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을 지닌 채 내 가슴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고향산천은 이미 사라지고 넓고 낮은 담록색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 여행 때는 이런 것이 별로 마음 쓰이는 일이 아니었지만, 차츰 낮은 지대의 마을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고향산천과 시민권을 이걸로써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걱정과 슬픔으로 변하여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레디 길차너의 갸름하고 예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예뻤지만 서먹해질 정도로 차갑고 나의 일에 무관심한 척 했기 때문에, 나는 터질 듯한 울화통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곧게 솟은 탑이며 하얀 처마가 보이는 맑고 깨끗한 마을들이 차창에 머물다 훌쩍 지나갔다. 사람들은 오르내리며 인사하고 웃고, 담배를 피우면서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재치있고 상냥하며 다정한 얼굴로 항상 웃음을 짓고 있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명랑하지 못한 고지의 젊은이인 나는 그걸 보면서 말없이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 고향을 떠난 것이다. 산들과 영 이별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상냥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붙임성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내 자신을 생각하니 처량해졌다. 이런 사람 중의 누군가가 레디 길타너와 결혼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중의 누군가가 언젠가 내 길을 가로막고 한 발짝 앞장서게 되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목적지에 닿았다. 집에 들어서면서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가 서랍을 열어 종이 뭉치를 끄집어냈다. 예쁜 종이는 아니었다. 그 종이에 석남꽃을 둘둘 말아 집에서 일부러 가져온 끈으로 그 포장을 잡아매어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사랑을 담아 보내는 선물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소중히 들고서 레디 길타너가 살고 있는 집 가까운 거리로 나갔다. 그 다음에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 열려 있는 대문을 들어섰다. 황혼이 깔린 어두침침한 현관을 기웃거리다가 모양없는 꽃다발을 널찍한 계단에 내려놓았다. 


나의 이러한 행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디 길타너가 이러한 내 경의에 찬 행동을 눈여겨 보았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한 묶음의 꽃을 그 집 계단 밑에 놓아두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고 기어내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뭔가 달콤한 것, 슬프고도 즐거운 것, 시적인 낭만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가끔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때, 그 꽃을 꺾던 모험은 그 뒤에도 모든 사랑과 같이 돈키호테적인 당돌함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내 청년시절에 여운을 남겼고, 정숙한 누님과 같이 사랑을 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좋은 집안과 탄력 있는 몸매, 조용한 눈망울을 가진 아가씨들을 보면 그때의 순수하고 고귀한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이 잔잔히 내 기억에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