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시인은 무엇을 보았는가'

헤르만 헤세                   


 남쪽의 7월 하루는 빛을 발하며 저물고, 산들은 푸르른 황혼 속에서 장미빛으로 봉우리들을 물들이며 넘실대고 있다. 들판에는 무더운 여름 한낮 무르익은 옥수수들이 탐스럽게 열려있다. 넓은 밭에 및은 잘 자라 있고, 들판과 정원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꽃 향기가 한적한 시골 거리의 퇴비냄새 속으로 흘러들고 있다. 울창한 수림 속에는 아직도 한낮의 열기로 가득차 있고, 황금빛 지붕은 이제 막 시작되는 황혼 속에서 따뜻한 여명을 발하고 있다. 

 이쪽 마을에서 저쪽 마을로 이어지는 무더운 거리 위로 한 쌍의 연인이 묵묵히 지나간다. 그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이별을 머뭇거리는 양 걷고 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서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태양열이 식어가는 황혼녘을 사랑으로 물들인 채 걸어가고 있다. 

 하얀 얼굴과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닌 소녀, 갈색으로 그을린 남자, 둘 다 늘씬하고 곧은 체격이 아름답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치 하나의 심장에서 비롯되어진 것처럼 가까워졌고 서로가 몰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다르고 서로에게서 멀 수도 있으리라. 

 동료 의식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단순한 어떤 놀이에서 운명의 끊으로 묶여지게 되는 변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능해진다. 그들은 그런 사랑과 묶여지게 된 운명에 미소지었고 슬픔이 가다올 때면 아주 진지해졌다. 

 어느 누구도 그 시간에 마을 사이의 그 거리를 지나가지 않았다. 들판의 농부들도 이미 하루의 일과를 끝냈다. 나무들 사이로 아직도 태양의 잔재가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근처 시골집에서 밝은 빛이 새나오고 있다. 한 쌍의 연인은 거리 위에 머물러 서서 계속 서로를 포옹하고 있다.

 남자가 소녀를 부드럽게 낮은 담이 뻗어 있는 거리의 한 모퉁이로 이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함께 밀어를 나누기 위해 그 위에 앉았다. 그들은 거리의 한 모퉁이 패랭이꽃과 제비꽃이 피어 바람에 한들거리고, 덩굴손이 뻗어 있는 낮은 담 위에 조용히 앉아 있다. 

 거리에 피어나는 먼지와 향기 틈 사이로 어린 아이들의 노는 소리, 어머니들이 부르는 소리, 남자들의 웃음소리, 먼 속에서 들려오는 고풍스런 피아노소리 등이 잔잔히 귓전에 부딪친다. 그들은 조용히 앉아 있다. 서로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위로 어둡게 드리워져 있는 나뭇잎과 그들을 싸고 있는 황홀한 향기와 따뜻한 공기를 느끼면서......


 소녀는 무척이나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길고 가는 목세 하얀 팔과 손을 드러낸 넓고 짧은 소매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척 가냘프게 보였다. 그녀는 자기의 남자친구를 사랑했고 그도 또한 자기를 매우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친구였고 어느 면에서는 그녀의 충고자이자 신뢰자인 한편 연장자였고 더 많은 것을 아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들은 호기심과 달콤한 이성에 대한 매력에 서로가 끌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그와 같은 것이 실현되었고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불붙게 되었다. 

 남자 역시 소녀가 지닌 정열적인 발랄함과 싱싱함은 없었지만 아주 멋있었다. 그는 소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인생에서 실패와 새로운 의욕을 가져보고 사랑을 경험해 보았으며 여러 가지 상황을 겪어 보기도 했다. 깊은 통찰력과 확신이 그의 수척하고 그을린 살색 얼굴에 강하게 나타나 있었고, 이마와 광대뼈에는 그가 살아온 운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부드럽고 헌신적으로 보였다. 그의 손은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으며 그녀의 어깨와 가슴을, 팔과 목덜미를 아주 소중하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입술이 황혼에 반사되어 마치 갓 피어난 한송이의 꽃처럼 그를 향해 다가오는 동안 그에게 있던 연정은 흥분되었고 솟구치는 격정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여름날 저녁에 함께 걸었던 많은 다른 여자들을 생각했고, 그의 손이 지금과 똑같이 부드럽게 머물렀던 다른 팔, 다른 머리결, 다른 어깨와 다른 여체를 알고 있음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 경험했던 똑같은 행위를 다시 하고 있다는 것, 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순간 일고 있는 감정은 소녀가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에게 이런 행위는 정말 들어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것, 최초의 것, 신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 술잔 역시 나는 들이마실 수 있어. 이번 잔도 역시 달콤하고 놀라울거야. 나는 이 젊은 한 떨기 잎을 훨씬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 자신이 10년 전이나 15년 전에 했던 것보다, 그리고 젊은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순수할 수 있어. 나는 그녀의 첫번째 경험의 문턱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친근하게 이끌어줄 수 있어. 그러나 내가 한번 몰입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싫증을 내게 된다는 것을 그녀에게 숨길 수가 없을 것이며, 그녀가 항상 꿈꾸고 있는 그 첫번째의 몰입을 능가하는 사랑의 연기를 더 이상 해보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감출 수는 없을 거야. 그러면 나는 그녀가 놀라서 울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나는 냉정해질 것이며 그러한 것에 참을 수 없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되는 순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아니 지금 이미 두려워하고 있어.'


 그들은 말없이 들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있는 돌담 위에 앉아 있다. 서로 가까이 붙어 앉아서 기쁨 속에 들뜨기도 하고 서로가 더욱 친밀하게 몰입했다. 그들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중얼거리는 듯이 어린 아이들 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사랑...연인...나를 사랑하시나요?


 그 때 빛이 퇴색하여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시골집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 대략 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신발은 신지 않은 채 수척한 무릎 위로 짙은 색깔의 짧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회갈색 얼굴에 긴머리가 넘실거렸다. 

 그 소녀는 놀이를 하는 듯 손에 줄넘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소리나지 않게 조그만 발을 구르며 오고 있었다. 약간 망설이며 당황한 표정으로 연인들이 앉아 있는 맞은편으로 깡충깡충거리며 다가왔다. 그 연인들 앞에까지 왔을 때 그 소녀는 그들에게로 가는 것을 주저하는 듯 마지못해 그 사이를 지나갔다.

"안녕!"
 담 위에 앉아 있던 소녀가 친근하게 인사를 했고 남자도 정답게 인사를 했다.

"꼬마 아가씨, 안녕!"

 그 소녀는 주저하는 듯 머뭇거리며 천천히 지나갔고, 50보 정도 떨어진 곳에 머물면서 멈칫멈칫 돌아갔다가 다시 가까이 오고, 또 다시 연인들 사이를 지나가기도 하면서 쑥스러운 듯이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시골집의 정원 속으로 사라졌다.

"아주 귀여운 아이로군!"

 남자가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황혼은 더욱더 깊어졌고, 그때 정원 문에서 또 다른 한 여자 아이가 나왔다. 잠시 머물러 서 있다가 거리를 몰래 살펴보고는 돌담 주변의 나뭇잎과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아이는 빠른 걸음걸이로 연인들 앞을 지나갔다. 그 아이는 다시 돌아와서 정원 문까지 달려갔다가 잠시 쉬고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조용하게 혼자서 달려가곤 했다.

 연인들은 말없이 그 아이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달려가는지, 어떻게 돌아갔다가 오는지, 여자 아이 무릎 주위에서 남색 스커트가 어떻게 넘실거리는지를 보았다. 그들은 그 여자 아이의 빠른 걸음걸이가 그들과 관계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서 마법의 힘이 빛을 발하여 이 어린 소녀의 조그마한 꿈 속에 사랑의 예감과 조용한 감정의 속삭임이 일렁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소녀의 걸음걸이는 한마당 춤사위가 되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흔들어대면서 가깝게 다가왔으며 이리저리 움직이며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그 소녀는 아무도 없는 저녁 거리 위에서 혼자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은 곧 구애의 표시이기도 했으며, 미래에 대한, 사랑에 대한 기도요, 노래이기도 했다. 어린 소녀는 진지하고도 헌신적으로 그 춤에 몰입하였다. 이쪽 저쪽으로 흔들어대면서 서서히 어두운 정원 안으로 사라졌다.

"그 어린 소녀는 우리에게 매혹되었는가 봐요."

 돌담 위에 있는 소녀가 말했다. 

"그 어린 소녀가 사랑을 느꼈나 봐요."

 소녀가 다시 말했다.

 남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린 소녀가 사랑에 의해서 앞으로 경험하게 될 어떤 것보다도 그녀의 춤 속에서 뭔가 아름답고 완전한 것을 향유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자기들이 사랑에 의해서 뭔가 최상의 것, 아주 온유한 것을 이미 향유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 앞에 올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공허한 것 뿐이라고 느꼈다.

 그가 먼저 일어서면서 같이 앉아있던 소녀를 돌담에서 일으켰다.

"자, 이제 가야만 되겠어. 저 십자로까지 내가 바래다 줄게."

 그들이 정원 문을 지날 때 주위의 집들과 정원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석류알만이 적막한 밤 속에서 아직도 밝고 빨간 빛을 내고 있었다.

 서로 껴안은 채 그들은 십자로까지 왔다. 그들은 이별하기 위해서 열정적인 키스를 하고는 서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러다 다시 한번 돌아서서 열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그러나 키스가 그들에게 더 이상의 행복감을 주지는 못했다. 단지 심한 갈증만 느낄 뿐이었다. 소녀는 급히 자기 길을 갔고, 남자는 오랫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지나간 날의 갖가지 이별들, 여러번의 밤의 키스, 다른 입술, 다른 이름, 다른 슬픔이 그를 엄습해 왔다. 그는 나무 위에 떠오른 별을 따라 천천히 되돌아갔다.

 그는 잠들 수 없었던 그날 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에 일어났던 것들을 반복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야. 나는 아직도 많은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여자들도 나를 아주 사랑하겠지. 그리고는 이별이 되겠지. 조용한 춤으로 우리를 매혹시켰던 그 어린 소녀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느꼈어. 이제부터라도 나는 춤추는 것을 배워야만 하고 사랑의 유희에 대한 욕구를 음악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해. 그리고 관능을 기도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하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항상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지나간 것들을 아무런 소용없이 반복하지 않아도 될 거야. 자, 이제 나는 그 길로 되돌아 가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