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달 동안을 다른 곳에 떠나 있다가 테씬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나는 언제나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새로운 감동에 휩싸이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옮겨 심고 자양분을 흡수하는 새로운 뿌리를 내려야 하고, 실뿌리들을 다시 키우고 새로운 습관에 다시 길들여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과거와 고향의 의미를 다시금 음미해야만 한다.

 트렁크를 풀어놓고 여행 동안 신었던 구두와 여름옷들을 챙겨 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난 겨울 동안에 침실에 비가 들이치지 않았는지, 또는 이웃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또한 지난 몇 달 동안에 이곳에 무엇이 변하였는지, 그리고 이 사랑스런 지방에서 오랫동안 지켜져 나온 순박성이 점차로 사라져 가고 문명의 찌꺼기로 빚어지는 소송사건이 얼마나 생겨났는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아래 계곡의 산허리는 벌목으로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고, 별장이 세워졌으며 도로의 길 모퉁이가 확장되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매혹적이던 옛 정취는 완전히 망쳐졌던 것이다.  

 

 우리 지방의 마지막 우편마차가 사라지고 자동차로 대치되었는데, 이 새 자동차가 옛날의 골목길을 달리기엔 너무나도 좁았기 때문에 길을 넓혔을 것이리라. 나는 늙은 피에로와 힘이 넘치던 두 필의 말을, 그리고 그가 역마차 마부의 파란 제복을 입고 노란 마차를 타고서 덜커덕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로또 델 빠세 술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잠깐 동안 공무 외의 휴식을 취하도록 그를 유인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얼마 있으면 내가 가장 즐겨 그림을 그리는 장소인 루가노 위의 화려한 숲가에 앉아 있지도 못하게 되리라. 어느 다른 지방 사람이 숲과 초원을 사들여 철망을 둘러놓았으며, 아름다운 두세 그루의 물푸레나무가 서 있던 곳에는 이제 차고가 만들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포도넝쿨 아래의 풀이랑은 옛날대로 싱싱하게 푸르르고, 시들은 나뭇잎들 아래에서는 청초록의 에머럴드 빛 도마뱀들이 여전히 바스락거리고 있다. 산림은 상록수와 아네모네와 딸기꽃들로 파랗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롭게 돋아나는 초록빛 숲들 사이로 잔잔한 물결을 이룬 호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나는 트렁크를 정리하고 마을의 새소식을 접하고는, 세상을 떠난 체스꼬의 미망인에게 조의를 표하고 니네따에게는 검은 눈동자를 한 그녀의 아기를 위해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의자, 좋은 양질의 수채화용 스케치북, 연필, 물감 등 회화용 도구를 찾아 준비하였다.

 이러한 때에 내 팔레트의 조그만 칸막이에 나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코발트색, 미소짓는 주색(朱色), 부드러운 레몬처럼 노란색, 투명한 갬보우즈 등 신선하고 밝게 반짝이는 물감을 채우는 것이 언제라도 즐겁고 뿌듯하다. 지금 그 일을 해두리라. 

 그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또 하나의 다른 일이기에 나는 기꺼이 얼마 동안-내일까지, 일요일까지, 다음 주일까지-연기를 하리라. 6개월이 지나서야 다시 푸른 초원에 앉아서 붓을 물에 적시고, 여름의 한 조각을 다시금 화폭에 옮겨놓으려고 할 때면, 나는 습관을 벗어난 눈과 서툴러진 손을 가지고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몰라 슬픈 마음으로 그저 가만히 앉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풀과 돌, 하늘과 구름은 옛날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 보여서 그것을 그리려 한다는 것은 전보다도 더욱 불가능하고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여겨진다. 그래, 나는 한동안을 더 기다리리라. 

 여하튼간에 온 여름과 가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다시 한번 나는 서너 달 동안을 쾌적하게 지내고 난 후 관절염의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나마 해방되어 물감을 가지고 즐거운 작업을 하면서 좀더 즐겁고 순박하게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다. 

 세월은 빨리도 흘러간다. 내가 이 마을로 이사 올 때에 맨발로 학교를 뛰어다니던 어린이들이 벌써 결혼을 하였다. 루가노나 마일란드에서 타자기나 판매대 뒤에 앉아 일을 하던 당시에 나이가 많았던 마을 노인들은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니나가 머리에 떠오른다. 아직도 살아 있을까? 맙소사, 이제서야 그녀를 생각하다니!

 니나는 내 여자친구이다. 이 지방에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훌륭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일흔 여덟 살이며, 새 시대가 아직 손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이 지방의 가장 구석지고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다. 그녀에게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난하다.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몇백 미터의 산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산을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곧 길을 떠나 우선 포도원과 숲을 지나 산 아래로 내려갔다. 푸르르고 좁다란 산골짜기를 가로질러간 다음에 여름에는 시클라멘이 가득하고 겨울에는 눈덩이가 물이 가득 괴는 산허리를 넘어 가파른 산을 올라갔다.

 마을에서 만난 첫번째 아이에게, 지금은 늙은 니나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저녁이면 여전히 교회 담벽에 앉아 코담배를 들이마시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만족스런 마음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직 살아 있으며, 나는 아직 그녀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약간은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늘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난과 고독을 끈질기고도 익살스럽게 견디어 낼 것이다. 세상에 대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찬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멀리하고 마지막 시간까지 의사도 목사도 찾지 않을 것을 결심한 채 고독하게 늙은 인간의 전형적인 범례를 보여 줄 것이다. 

 나는 예배당을 지나 어두컴컴한 태고적 담벽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담벽은 거기서 구부러져서 산등의 암벽 위에 아스라이 서 있었다. 휘황찬란히 빛나는 태양 밖에 모르고, 계절의 변화 이외엔 수십 년이 흐르고 수백 년이 흘렀어도 아무런 변화도 모르는 채 서 있었다.

 언젠가는 이 낡은 암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이 아름답고 암흑에 싸인 비위생적인 벽촌도 개조되어 시멘트와 함석, 흐르는 수도물과 위생시설, 전축과 다른 문화시설들로 장식될 것이다. 늙은 니나의 유골 위에는 프랑스식 메뉴를 비치한 호텔이 서거나, 어느 베를린 사람이 여름 별장을 지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아직 그대로 서 있으며, 나는 높다란 문턱과 돌로 된 굽은 계단을 넘어서 내 친구 니나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그을음과 커피 냄새가 나고 생나무의 연기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굉장히 커다란 아궁이 앞의 돌바닥에 그 늙은 니나는 낯선 의자를 놓고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 연기로 인해 약간의 눈물을 흘리면서, 관절염으로 꾸부러진 갈색 손가락으로 타다 남은 나무를 불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여보세요, 니나, 안녕하세요? 아직 나를 알아 보시겠습니까?"

 "오, 시인(詩人)선생. 친애하는 내 친구, 다시 만나서 기뻐요!"

 내가 말리는 데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굳었기 때문에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왼쪽 손으론 나무로 만든 담배통을 떨면서 들고 있었고, 가슴과 등어리엔 검은 모직 천을 구르고 있었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서 날카롭고 예리한 눈길이 슬픔과 쓸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은근한 미소와 우정어린 모습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신사이며 예술가라는 것, 그렇지만 내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그저 홀로 테씬 지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두 사람이 다르다 할 지라도 그녀 자신처럼 푸짐한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니나, 당신이 나에 비해 40년 일찍 태어났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정말 유감스럽소!

 그러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약간 충혈된 눈과 구부러진 팔다리, 더러운 손가락으로 코담배를 맡고 있는 당신은 차라리 많은 사람들에게 마녀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름투성이의 독수리 같은 얼굴에 달린 코는 어떠한가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서게 되면 바싹 마른 키의 그 태도는 어떠한가요! 당신의 자유로우며 놀람이 없는 눈은 매력적으로 보일 뿐더러 정열적이면서도 악의가 전혀 없게 보입니다. 

 백발이 된 니나여, 당신은 얼마나 아리따운 처녀였으며, 얼마나 대담하고 현숙한 부인이었을까요!

 니나는 내게 지난 여름과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내 친구들과 내 누이동생들, 그리고 내 애인들을 회상시켜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전자의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커피를 쏟아 넣었다. 커피를 한 잔 내놓고 내게 코담배를 권했다.

 우리는 불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불 속에다 침을 뱉으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점차로 조용해지면서 우리는 관절염과 겨울, 그리고 인생의 회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관절염! 그건 창녀 같아, 염병할 창녀지! 추악한 창녀야! 마귀가 잡아가 버였으면 좋겠어!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래, 욕짓거릴랑 그만두지. 당신이 와줘서 기뻐요, 정말 기뻐요. 우린 영원한 친구가 됩시다. 사람이 늙으면 더 이상 많은 사람이 찾아오진 않거든. 난 지금 일흔 여덟이야."


 

 그녀는 다시 한 번 간신히 일어나서 색이 바랜 사진들이 꽂혀 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내게 줄 선물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찾아내지를 못하자, 그녀는 옛날 사진 한 장을 손님에 대한 선물로 제공하였다. 그것을 받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담뱃갑에서 다시 한번 코담배를 들이마셔야 했다.

 내 여자친구의 부엌은 연기로 그을려서 깨끗하지 못한 곳이다. 바닥은 온통 침 투성이고 의자는 찢어져서 흉칙하게 늘어져 있다. 여러 독자들 중에서도 이 커피잔으로 무엇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양철로 만든 낡은 커피잔은, 검정으로 시커멓고 재 찌꺼기로 회색빛이 되었으며, 가장자리에는 여러 해 전부터 졸아져 달라붙은 커피가 두꺼운 딱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니나는 오늘날의 세계와 시대 밖에서, 약간은 너덜거리며 초라하게 비위생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대신 숲이 있는 산 속에서 염소와 닭과 함께 먼 옛날 동화 이야기처럼 살아간다.

 찌그러진 양철컵으로 마시는 커피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나무 연기의 씁쓸한 냄새와 약한 방향(芳香)이 깃들은, 아주 검고도 진한 커피를 마시며 욕짓거리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무도회를 곁들인 어떤 파티보다도, 저명한 지식인들이 모여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화려한 만찬보다도 내게는 훨씬 더 즐겁다.

 밖에는 이제 해가 저물었다.


 니나의 고양이가 들어와서 그녀의 무릎 위로 뛰어들었다. 불빛이 석회질이 된 돌벽에 따스하게 비쳤다. 그림자에 가려지고 텅 빈 돌로 된 이 드높은 동굴 속은 겨울에 얼마나 춥고 살벌한 바람이 몰아칠까. 그 속에는 아궁이에 펄럭거리는 미세한 불길과 고양이, 그리고 닭 세마리 이외엔 다른 동료라곤 없이 뼈마디마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늙고 고독한 여인만이 홀로 쓸쓸함을 달랠 것이다. 

 고양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니나는 일어섰다. 날카로운 눈길을 가진 독수리 같은 얼굴 위에 하얀 머리털을 가진 모습,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녀가 황혼 속에서 커다랗게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은 더 그녀의 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를 가지러 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