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04-26 새터교회 목사님 말씀인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내가 예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입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먼저 아셨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아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알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내가 지금까지 자라오는 동안 무수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첫 모습은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입니다. 콧대가 오똑하고 눈이 깊고 긴 머리가 이국적이었던 예수님. 그 모습의 예수님은 내가 교회가서 헌금하고 전도하고 출석을 잘 하면 꼭 상을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에서 나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종합우수상을 새로 만들어서 상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상을 받을 때의 뿌듯했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교회는 나를 칭찬해주었습니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 청소년기에 들어가면서 나는 문득 예수님이 무서워졌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라는 하나님도 무서운 건 매일반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을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으로 구분하는 능력과 권한이 있으신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 주로 졸음을 담당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내가 정말 믿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전도사님이나 선생님은 자꾸만 나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분들이 심어주시려던 구원의 확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지옥의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그분들도 그놈의 확신이 있으셨는지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마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있으셨다면 나같은 어린 양을 공포로부터 구원해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헤헤.

 

그 다음으로 만난 예수님은 감정적인 고양의 상태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나도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걸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눈물이라고는 없던 내가 기도할 때 울게 된 것을 가지고 나는 이제 내가 구원받았구나,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다툴 때, 친구들 사이에서 외로울 때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부모이며 친구가 되어주셨지요.

 

어설프게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분이 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절대 선교사가 되거나 목사 사모가 된다는 서원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더 깊이 신앙에 빠져들 때면 마음의 고삐를 다잡았지요. 워워. 됐어. 거기까지야.

이상하게 대학을 들어가서 우연챦은 계기들로 오히려 신앙에 깊이 빠지게 되었어요. 그 예수님은 혁명가였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많은 사람들도 다들 자기 모순에 가득차 보였는데 예수만은 유난히 빛나는 사람이자 신으로 보였죠. 따르고 싶었어요. 장애가 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라도. 헤헤. 지금 생각하니 귀엽네요.

 

그러다가 갑작스레 좀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었죠.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다양한 모양인 거예요. 이건 진리가 아니다. 적어도 진리라면 엇비슷하게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 아니냐 한 거예요. 한 몇 년, 맘 속으로 신앙을 저버리고 살았어요. 그도 참 괜챦았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교회와 기독교 단체 언저리를 벗어나질 못했어요. 다 착해서 병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그렇게 원하시는데 교회를 안다니는 것도 좀 뭐했고 학생때 거의 몸 바쳤던 단체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데 그걸 또 아니라고 하기도 좀 뭐했어요. 물론 그때는 헌신과 결단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다 착해서 병이다, 이런 생각은 안했지요.

 

테이프를 좀 빨리 돌려야겠어요. 여차저차하여 목사까지 되고야 말았어요. 지금도 참 웃겨요. 무슨 생각으로 목사를 한다고 했을까? 왜 그랬을까요? 이러저러한 선택과 결단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다른 결로 나를 만나주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예수를 참 좋아했어요.

 

요즈음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가장 마음으로 설레는 호칭은 목자예요. 이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긴 서론을 갖다 붙인 거예요. 아마 주일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내 목자라고 고백하는 건 지금 내 삶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내가 양이고 그분이 나의 목자라면 지금 내가 처해있는 모든 상황은 그분이 인도하신 거쟎아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를 인도한 것도 바로 목자이신 거죠. 그런데 목자는 분명히, 틀림없이 나를 그리도 그리운 사랑의 왕국으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지금 어떤 상황에 있던지 부족함이 없는 것, 그게 내가 예수님은 나의 목자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다, 고백하는 의미예요.

 

지난 해 참여했던 데카그램 수련에서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물으셨어요. 나에게.

“**님. 지금 예수님은 나의 목자라고 믿으세요?”

얼결에 ‘네’라고 대답했겠죠.

“에이, 아닌데. 부족한 거 많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요.”

 

나는 아무래도 요즈음 들어서 드디어 믿게 된 것 같아요. 헤헤. 목사가 이런 말 하다니 좀 웃기긴 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아직 머리로 믿는 거예요. 근데 머리로는 흔들림 없이 믿어요. 이 믿음을 가슴과 몸이 온전히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지금 우리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끌어주신 것이라는 걸, 그래서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걸 믿기 시작한다는 건 무척이나 경이로운 일이에요.

예수님이 나의 목자라는 말이 믿어지니까 그분이 다른 사람들의 목자라는 것도 믿어져요. 모두들 아주 더없이 충만한 때를 살아가고 있구나, 또 어려운 때라고 느껴져도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시려고 준비하시는구나, 하고 믿어지는 거죠. 그러나 아직 머리에 머물러 있어요. 헤헤. 머리로 아는 것도 중요하니까.

 

나와 같이 여기 함께 있는 우리들도 지금부터 예수는 나의 목자임을 믿게 되기를 바래요. 삶이 참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요. 그럴 수 있다면 삶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펼쳐 보여줄 것이고 그건 참 고맙고 경이로울 거예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지금 이대로 부족함이 없다네.” 목자되신 주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양들에게 오늘 들려주시는 목소리입니다. 양들은 이 소리를 압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