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만 하면 전화번호부 책도 재미가 있어요.

지금 삶에 재미가 없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혜민 스님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나는 이 한마디로 어두웠던 날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는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거두고 순간들에 집중해 보았다.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커피를 입 안에 녹이는 순간, 글자를 보는 순간, 사람들의 대화에 끼는 순간. 나는 의도적인 몰두를 감행했고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시간은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흘렀고, 사람들과의 대화는 아주 오랜만에 지루하지 않았으며, 공부 시간은 매일 열 시간을 금방 넘겼다. 무엇보다 늘 재미가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추진하고자 하는 어떠한 일들에 금방 성취를 맛보았고 이로 인한 자신감의 상승도 그 기쁨에 일조를 했다.


그러나 내게는 순간의 재미가 행복은 아니었다.

지극히 나에게 있어 행복의 정의는, '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마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토록 기대하고 바라는 장밋빛 행복은 없으니(특히 나와 비슷한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순간과 찰나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지는 오래되었다. 나는 이 진리를 헤세의 오래된 글(지금은 절판된)에서 처음 발견했고, 그 뒤로 여러 스님들에게서 수차례 확증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너무도 슬픈 일이다. 내 안에 살아 숨쉬는 진실된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눈 앞에 펼쳐진 재미없고 시시한 그들에게 한껏 웃는 얼굴로 집중해 보는, 한마디로 극단의 꼭두각시 인형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이 행위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생명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고,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겠다는 계약서를 내민 것과 같은 꼴이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한 인간의 뇌에 거듭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어 생각과 마음까지 속이면 그 작은 행복들을 언제든 출력시킬 수 있다.


"어차피 그래도 살아가는거... 좀 재밋거리 찾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는가.. 뭐 이런 생각하면서 만든 노랩니다."


광석이형이 '일어나'를 부르기 전 한 말처럼, 이 삶의 방식은 '어차피' 살아야 하는 인생들에게 하나의 재밋거리로 일품인 것이었다. 어쩌면 불쌍한 생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방책들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루 내내 눈을 크게 뜨고 많은 것에 집중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침침하고 아파오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다시 가보지 못한 저 언덕 너머의 무지개가 아른거리게 되는 것이다.


고독의 반대말은 몰입. 인생은 연극. 누구나 자기에게 맡겨진 배역에 맞는 하나씩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가는 중에, 굳이 그 연극을 접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던져진 그 배역에 몰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의 방편이다. 심심한 인생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