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는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내가 아직도 뭔가를 잘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기 바랍니다.


세상에 교회,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교회나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웬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걔네들은 신앙을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걔네들의 비판이나 들이대는 몇 가지 증거 때문에 기독교를 그만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시하고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그만 둔 것이 아니란 소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앙생활을 그만둘 당시 나는 인생이 망가질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뻔히 알아버린 그 길을 한 걸음도 더는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은 가히 충격, 아니 그 이상이었습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듯, 알약을 주워 먹은 대신 비극적인 날들과 고통스런 미래가 내게 인사를 하고 있었죠. 


왜냐고요,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모든 선택과 집중을 기독교에다 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20년 정도는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쌓아온 인간관계, 일부러 지원한 학교, 내 8할을 지배하는 정신세계까지 모두 기독교로 물들였는데 그 곳을 하루아침에 탈출하기란 너무도 외로운 사투가 될 게 뻔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빠져 나왔고, 나는 이 부분에 어느정도 대견함이 동반된 자부심을 가지는 편입니다. 이제 내가 완전한 그 곳의 색체를 빼기까지는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그 뒤로 다시금 어느 작은 교회를 찾아갈 예정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글에선가 배 나온 마흔 살 쯤이 되면 작은 동네 교회를 다시 다녀보고 싶다 한 겁니다. 이건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같은 마음이라고 해 둡니다.



내가 하고픈 말은...... 내가 당신들이 가지는 그 평온한 느낌과, 누군가 얘기해주는 듯한 포근함, 삶에 찾아오는 안정감, 따뜻한 감정, 가끔씩 복받쳐 오르는 신을 향한 미안함이나 감사함의 눈물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를 다님으로써, 기독교인으로 삶으로써 느껴지는 그 행복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느껴 보았고 그 달콤함들을 알고 있는 채로 뒤돌아섰습니다.


물론 그 기저에 당신들이 무서워하는 '영혼'의 실체나 '천당/지옥의 유무'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지옥이 실제로 있다고 치면 소위 X됐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나도 지옥이 참 무섭습니다. 누군들 안 무섭겠습니까? 기독교나 교회, 성경은 사실 이 '협박'으로부터 출발하는 종교입니다. 한마디로 '두려움을 기반한 통치'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그 위에 독자를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등등의 스토리로 사랑과 감사의 기운들이 덮일 수 있도록 잘 구조화 시켜놓았습니다.


내 말이 아직 고깝게 들린다면, 성경을 훑어 보기 바랍니다. 성경은 처음에 아담이 뱀(사탄)에 홀려 선악과를 집어다 먹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무시무시한 죄악의 등장으로 처음부터 너희는 죄인이고 다 죽을 운명이다는 전제로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예수(Jesus)가 등장합니다. 사실 당신이 그렇게 믿는 그 종교의 탄생지의 민족(유대 민족)들은 아직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기서도 수많은 계파가 갈리는 중에 '개신교'가 있는 것이고, 보통 대한민국에서 교회 다닌다, 크리스쳔이다 하면 여기에 속하는 겁니다.


어느정도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수많은 갈래들로 나뉘는 그 교파들 가운데 어찌보면 당신이 선택해 다니는 교회(단체)는 참 작은 줄기일 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목놓아 중요하다고 외치는 '진리'에 이렇게 수많은 파와 갈래가 생기면 안되지 않느냐는 거지요. 변하지 않는 한가지 사실, '진리'. 그리고 이 진리를 믿고 시인해야만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갈래가 셀 수 없이 많다면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신에게 자기의 마음과 정성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지금의 당신과 똑 닮은 모습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마따나, 세계 여행을 한 번만 해 보면 금방 기독교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수 만가지의 종교와 종교인들을 본다면 생각이 복잡하고 깊어질 것입니다. 개신교는 그들 중 자신의 것만이 유일하다고 외치는 종교입니다. 가장 수준이 낮고, 개념이나 난이도도 쉬운 종교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 간단하고 알아듣기 쉬운, 두려움을 기반한 원리에 가장 많이 모여들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백번 양보해 개신교에 '진리'가 들었다고 칩니다. 마치 금광 '노다지'를 캐는 모습입니다. 수 만가지의 종교 중에 참으로 잘 선택해서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이 개신교 안에 나뉘는 교단, 교회들 끼리도 그렇게 물고 뜯고 싸우고 있습니다. 대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싸우는 정도가, 건전한 비판 정도에 그치는게 아니고 아예 저 교회는 '이단'이라 명명을 하며 싸우고들 있습니다. '이단'이라 함은 저 쪽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 쪽 교회를 다니면 지옥에 간다는 소립니다. 노다지 캘 확률을 뚫고 개신교에 줄을 잘 섰는데, 교회를 잘못 골라 지옥행이라니! 그들은 너무 재수가 없는 걸까요?


누구 말이 맞는 걸까요? 일요일마다 무대에 올라 양복을 입고 마이크에 뭐라뭐라하는 아저씨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다 똑같이 여겨집니다. 나는 차라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은 영혼이라면, 성경을 파면서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이 합리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교회를 다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인들이 공통의 '경전'으로 인정하는 성경에 입각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좋은 가르침들이 많고 실생활에 잘 적용한다면 이로워 보이는 메세지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방금 짚은 개신교의 폐해는 경전이나 중심이론의 문제보다는 그것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의 탓이라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성경 66권도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보면 그 근본이 심히 연약하고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선 대다수 개신교인들이 관심도 없으며 회피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 66권 대부분의 저자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말 할 것도 없으며, 그 이유야 워낙 역사가 오래되고 유구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66권의 정경화 작업, 소위 '편집' 작업이 콘스탄틴 황제 한 사람에 의해 독재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껄끄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절 수많은 다른 경서들이 불태워졌으며, 일요일 예배, 12월 크리스마스 등 황제 개인의 태양신 숭배 사상과 묘하게 짬뽕 된 문화가 지금도 지켜진다는 사실 또한 덤으로 두겠습니다.

그 외 기독교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강의한 이 영상도 도움이 될 거라 봅니다. (https://youtu.be/UASWwUFmwzg)


'밀라노 칙령'을 필두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정치'와 결합하면서 로마를 넘어 유럽의 선두 종교가 되고, 통치의 한 수단이 되며 역사적인 수많은 악행들을 자행하고, 무고한 피의 강물을 흘려보내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굳이 상세히 기록해 두지 않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고팠던 말은 사실 여기에 있던게 아닙니다.


*

나는 그대들이 어떤 감정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신앙인의 길을 걷고 있는지 뼛속까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행복감, 몽글몽글한 황홀감은 심지어 내가 가끔 그리워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 스스로 대견한 마음, 하루 하루 뭔가가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 같은 기분, 가슴이 터질듯한 마음 등은 나로 하여금 그 곳에 만족하고 안주하도록 했습니다.


내가 필히 예감하는데, 나는 그대들 중 웬만한 사람들보다 더 심하고 깊게 신앙의 길에 들어서 보았을 겁니다. 성경을 아주 어릴적부터 읽어 왔고, 시험도, 퀴즈도 많이 풀었던 터라 머릿속에 아직도 한 권이 그냥 있다시피 합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에 관심이 많아 이곳 저곳 내 발로 찾아다니기도 했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이름들은 조용기, 윤석전, 이동원, 박보영, 유기성, 변승우, 조정민, 김옥경, 정원, 김인중, 김기동, 이재철, 김삼환, 장경동, 김학중, 지용훈, 이한수, 강대형, 옥한흠, 하용조, 이찬수, 김동환, 노진준 목사 그 외에도 나와 관계를 맺었던 여러 개척교회 목사, 전도사들이 수도없이 많습니다. (이중엔 내가 아직도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뿐아니라 나는 여러 루트를 통해 알게 된 선교사나 평신도 강연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데이비드 김, 원종하, 이용도, 이기풍, 최권능, 박성업, 김우현, 손기철, 김용의, 원종수, 이용규 등등, 국내에 만족할 수 없어 외국인들에게도 눈을 돌렸습니다. 마이크 비클, 빌 존스(베델교회), 제레미 리들, 미스티 에드워즈(아이합), 스캇브래너, 테리맥알몬, 안드레 에쉬빌, 조슈아 밀스, 밥 존스, 바비 코너, 로렌 커닝햄, 로렌스 형제, 성 프란시스, 선다 싱, 잔 생거, 샨 볼츠, 찰스 스펄전, 데이비드 오, 베니 힌, 폴 워셔. 아마 나를 거쳐간 가운데 내가 생각나지 않는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더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들을 그저 유튜브에서 스치듯 보고 지나갔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이들의 책을 사서 읽고, 강연들을 주기적으로 듣고 감동을 하며 몇 개월간 매료되어 지냈으며 이들 중 상당수의 교회를 직접 가 보았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는 이들이 발언하는 중심 사상이나 성격 등을 잘 알고, 서로 다른 차이점들을 짚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들의 근처에 있으면서 화려한 모습 이면에 숨은 전혀 다른 얼굴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죠.


나는 기도굴과 방을 전전하면서 이들의 노래와 강연 등의 도움을 받아 수도생활과 다름 없는 날들을 살았었습니다. 내가 형식에만 치중해 있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소위 그대들이 말하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인식되는 내 내면의 행복감은 계속해서 날 덮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생활을 그만 두었냐, 시간이 없고 귀찮아져 아주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나의 '현실감각'이 떨어져 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세에 집중하고 신앙생활의 정수로 깊이 빨려 들어갈수록 현재를 초월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신앙을 무거운 개념으로 의식 깊숙한 곳 까지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나와 같은 경험을 거칠 것입니다. 나는 소위 이 '수도 생활'이 너무 달콤해 그 외 내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현재의 모든 것들에 의욕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신의 '백성'으로 살다보니 1인칭의 나의 이름은 내 인식 속에서 사라져만 갔습니다. 내가 기도를 멈추고 현실로 돌아와 해야 할 것들을 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죠. 그것은 마치 내가 다른 자아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실을 두 눈으로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냉철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애매모호함 사이에 나는 필연적인 갈등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기에 줄곧 느꼈던 나의 모습은 마치 발톱이 빠진 한 마리의 호랑이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현실에도 잘 맞추어 살고, 교회에 오면 또 하나의 다른 자아를 가진 인격체가 되어 울며불며 감동을 받는 그 두줄타기를 잘 하는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의 깊이만큼 믿지 않았던 것임이 시간이 갈수록 확연했습니다. '덥든지 차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는 성경의 귀절처럼 나는 이 종교를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수 년간을 이 경전(성경) 한 권과 그 해설들에 빠져 보냈습니다. 꿈과 환몽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파묻혀 사는 날들이 계속 되었고 나는 현실과의 갈등 속에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어느 작가의 책도, TV의 어느 프로도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메세지와 상충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이 들어서였지요. 여행, 타인과의 잡담, 쇼핑, 다른 분야의 공부 등은 기독교의 이론과 크게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어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 조차 꺼려지기 시작했지요. 아이러니하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과 정반대의 삶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나는 되도록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죄'의 기준조차 명확히 성경에 나와있지 않아 애매한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어쨌든 내 기준에 껄끄러우면 그 찝찝함이 견디기 어려워서 청교도인 마냥 살았죠. 실수를 한 뒤 다시금 '회개'기도를 하면 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개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막말로 한 소녀를 성추행하고 돌아와서도 교회에 앉아 예수의 이름을 빌어 '죄송합니다'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게 아무리 진심일지언정 나로써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렇담 그 소녀에게 남은 상처는요.


어쨌거나 상태가 이러니 종국에 나는 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정도를 모르고 너무 오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믿으면 이 루트를 따르게 될 거라고 나는 감히 확신하겠습니다. 정도껏, 적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나처럼 아예 전신과 전심을 거는 부류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다면 필히 목사나 선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불교를 먼저 만났다면 나는 반드시 스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 성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차여행과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좋아하던 나, 축구 시청과 축구 게임을 좋아하던 나, 그리고 대한민국의 한 가정에서 남자로 태어나 삶의 무게를 짊어질 책임이 있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많은 것들이 망가지고 무너져 버린 뒤였습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현실감각을 다시 살려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시 비를 맞으며 여행을 했고, 히사이시의 음악을 들었으며, 축구를 보았고, 늦은 세상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간 몸담았던 종교의 수많은 오류와 상식을 기반한 증거들은 그 후에 차츰 발견되기 시작한 것들입니다.


그 뒤로 나는 나의 인생을 살며,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기 시작했으며 그 뒷감당 또한 내가 책임지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대고 기도하고 그 실패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내가 지며 들었던 억울함이 더는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습니다. 이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의 근본 교리 중 하나인 '내'가 아닌 '유일신'이 주인이 되는 사상과 정 반대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개신교도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마귀가 속삭이는 영화로 인식해야 합니다. 영화 내에서 키팅 선생은 이렇게 말하지요. "현재를 즐겨라(seize the day!), 너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장미가 시들기 전에 봉오리를 따야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비추어 본다면 정 반대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에 집중하는 순간 내세는 없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장미꽃 봉오리를 따는 순간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상급을 쌓아라. 몸의 욕구를 따라가지 말고 영의 욕구를 따라 살아라."


당신이 성경의 중심사상대로 '내'가 주인이 아닌 다른 존재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면서도 가장 마지막 선택은 아마 당신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응답을 받아 말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무의식 중에 자행된 여러가지의 계산이 섞인 '나'의 판단의 결과물이라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혹자는 개인적인 체험 몇 가지에 이 종교를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내 주변에 이러한 케이스들이 많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 몇 가지를 타인에게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상식이나 이치에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경험들은 그 주체가 바뀌었어도 충분히 경험될 가능성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당사자만 조용히 믿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들을 들고 오며 증명하려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미국의 베델교회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금가루'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들을 영상으로 확인하고 신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기적'이니, 신비로운 현상들은 타종교에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무엇보다 모두가 부정할 수 없을만큼 시원시원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게 특징입니다. 꼭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마치 누군가 그렇다고 주장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 마냥 보이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간다던가 의혹만 남기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실제로 '금가루'들을 모아 성분 분석을 해 보았더니 순금이 아니고 문방구에서 파는 모조품 금가루였다는 것이 밝혀진 실례도 있었죠. 그네들이 '기적'을 운운하려면 적어도 성경에 적혀있는 엘리야의 불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땔감들을 쪼개는 스케일의 그림을 확인 시켜주기 바랍니다. 단순히 질병의 차도가 좋아지거나, 뼈가 1센치 늘어나거나, 금가루가 내려오거나 하는 것 말고, 물 위를 걷고, 산이 옮겨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을 보여 주기 바랍니다. 전자의 것들은 무의식의 힘을 입어 갑작스레 잠깐, 혹은 조작이 충분히 가능한 것들입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신교의 흥행 이유 중 하나가 발전하는 문화에 잘 편승하는 성격 덕분이라 봅니다. 이 종교는 다른 것들과 달리 음악, 사회관계, 해설, 문학활동 등의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구에서 넘어온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지루할 틈 없이 이 메세지를 쉽게 풀어주는 목사의 설교, 관련된 쉬운 서적들, 비교적 쉬운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이 이론과 메세지에 친숙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며 해갈을 하는 측면도 한 몫을 담당합니다.


나는 다시금 강조해 두지만, '진심으로' 믿었고 파고 들어갔었기 때문에 교인들과 크리스쳔들이 어떤 메커니즘을 따라 무슨 경험들을 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 어떻게 감동을 하게 되고 서서히 사로잡혀 가는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산재하는 많은 비판들보다 내가 한 마디 하는 것이 더 묵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실체를 알고 말하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내가 스스로 이 행위를 그만두었고, 나의 쌓아온 모든 종교적 정신세계와 단절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결정에 후회가 없고 도리어 상당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개신교인들이 주제를 넘어 타자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만 근절되었으면 하는게 나의 바람입니다. 인간보다 큰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게 나의 생각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보다 종교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요소들이 분명 존재할거라 봅니다. 이것들이 잘 발현되어 사회에 아름다운 방향으로 기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그런 교회를 혹 찾게 된다면, 나이 마흔이 넘어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을 때 다시금 교회 문턱을 찾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