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8일 우금치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 우금치는 이전만큼 춥지 않았다. 동학군, 즉 농민들의 거친 호흡과 피범벅이 되는 뜨거운 땀방울을 예견하고 있었으니까. 한여름보다 더 뜨거웠던 우금치 전투! 어쩌면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현대전을 배운 일본군,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조선 관군 앞에서 동학군은 솔개 앞의 병아리떼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신식 서양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일본 주력군 앞에서 죽창이나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던 농민들은 사격장의 표적지와 같은 신세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조선 관군의 어느 지휘자의 보고에 따르면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을 이루었어도 농민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 모습이 장엄했고 무서웠는지 그 지휘자는 그들이 악귀와 같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동료의 시체를 밟고 피의 강을 건너며 전진하는 농민들은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을 무지렁이들이 아니었다. 아마 더 이상 살육을 원하지 않았던 농민 지도부가 후퇴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그날 우금치에서 살아서 돌아갈 농민들은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순하디 순한 농민들을 이런 전사로 만들었던 것일까. 물론 그것은 동학(東學)의 가르침이 그들을 자유인으로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인내천(人乃天)!” 그렇다. 사람 한명 한명이 모두 하늘처럼 존귀하고, 그러니 자유롭다는 가르침이다. 그 누가 그들의 존엄성과 자유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한 사람들을 그 누가 다시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주인으로 죽을지언정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차가운 우금치를 한여름처럼 뜨겁게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금치의 열정으로 우리는 직접민주주의라는 뜨거운 이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한 제도다. 지금 나는 ‘간신히’라고 말했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으로 당당히 서 있으려고 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 [경향신문]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누가 민주주의를 모독하려고 하는가" 중 (2012.12.02)
우금치. 우금치를 가보고 싶다. 공주에 도착하면, 무열왕릉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차로 10분정도 내려갔을 때 우금치 고개가 나온다고 한다. 지금은 터널 위에 있지만, 그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 차를 잠깐 세워두고 올라가면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그곳에 딱 올라서면, 느낌이 싸늘하고도 굉장히 무서운 느낌이 든단다.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계속 전진해 내려왔던 것이다.
그 고개에 서면, 양쪽으로 기관총(1,2차 세계대전시 사용했던)을 든 일본군과 그들의 시다바리였던 조선 관군에 휩쓸려 피의 바다를 이루었던 광경이 저절로 그려지지 않을까. 동학군들은 죽창만을 들고 내려왔으니 애초부터 게임이 되질 않았을 것이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아주 더울 때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은 왜 서늘한지 알 거라며... 한여름에도 바람이 그토록 거칠게 불어댄다는 그 곳. 거기 가서 서 보고 싶다. 그 사람들은 인내천이었는데 우리는 뭔가? 우리는 현재 무엇인가?
동학농민운동 후 일본정부는 동학잔당들을 3년에 걸쳐 색출해 제거했다. 동학은 그렇게 셌다. 그들의 자치회의기구였던 집강소, 신분철파를 중심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말그대로 실현하려고 했던 눈물겨운 움직임들... 요 사이 한 달에 걸쳐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글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회의하고 결정했을지 상상해 보며, 제국주의 일본의 입장에서도, 심지어 당시의 조선 왕조에서도 그들을 아주 걸리적거려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살고 있는 공주에 내려가 우금치 고개에 꼭 같이 가기로 했다.
충남 공주시 우금치 고개
녹두꽃
작곡 - 조념 / 작사 - 김지하
빈 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 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 수록 홉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 버린 밤 끝 없고
끝없이 혀는 잘리어 굳고 굳은 벽 속에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 타네
녹두꽃이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려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득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흡뜨다 : 눈알을 위로 굴리고 눈시울을 위로 치뜨다. (홉뜨다의 잘못)
*시구문 : 시체를 내가는 문이란 뜻으로 '수구문'을 달리 일컫던 말.
*육시하다 : (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
1987년 10월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의 첫 번째 정기공연 날 무명의 한 청년이 서서 부른 단 하나의 노래는 사람들을 흐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날 공연을 본 김광석의 부모님께서 비로소 김광석이 음악의 길을 걷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가사에 집중해 듣다 보면 문득 떨림이 전해져 오는데, 핏발이 서도록 흡뜨고 적들을 바라보았던 아니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그 하나의 또렷한 눈동자가 그려져 무서워지는 나의 떨림인지, 숨져간 동학 선조들의 격노와 한에서 묻어오는 치가 떨리는 떨림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토록 진하고 센 민중노래를 거의 처음 접해본 나로써는 요사이 그 무거움 속에 살았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시구문, 육시토록'과 같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며 소름이 끼치고 전율이 일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들은 각자의 일선에서 이 무고했던 죽음들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전봉준 (全琫準,1855~1895) 조선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장군
녹두꽃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 관련 민요(동요)
-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나 몇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먼저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 이하 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 '우금치 전투'의 유래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심했던 시절,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고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부친이 항의하다가 곤장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분노한 그는 이 때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고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정부에서는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안핵사(대책본부장 격)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했으나, 정작 이용태의 횡포도 극심했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 동학군을 조직하여 그 유명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다. 이때 동학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여기에는 교주 최제우의 명예 회복에 누가 될 것을 우려한 이유도 있다) 동학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군은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조선 조정이 깜짝 놀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그 때는 이미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군과 톈진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동안의 평화는 깨지고 만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대를 보내 도성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멋대로 개화정책을 시행했고, 전봉준은 이번에는 척왜근왕을 외치며 농민군을 모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한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조선-일본 연합군에 참패했고 순창으로 퇴각해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부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된 후 사형당했다.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은 이 항목에 첨부된 사진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전봉준의 눈빛은 강렬하다. 녹두꽃에서 등장한 흡뜬 눈동자는 바로 저 눈동자였을 것이다. 당시의 전봉준은 포박당하는 과정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저렇게 가마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학 농민 운동 1차 봉기는 동학농민군이 선전해 전주성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나, 조정과 합의 하에 자진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양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함과 동시에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을 만든다.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고 조선을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이라고 읽는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 때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중심이라 할만한 북접은 전봉준을 부정하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게 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합류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 1만명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 1만명이 논산에서 만나 2만에 이르는 대군이 결집되었고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이때 이 전투의 관군 & 일본군 연합에서 지휘권을 가지고 전투를 주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농민군은 우금치 고개에서 정부군과 일본 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무기 숙련도가 높은 일본군이 돕는 정부군에게는 화력에서 열세였고,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이 대패하고 이후 각개격파를 당하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전봉준 장군고택 내부
애초에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에게 넘기지 않아서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한성에서 사형당한 전봉준의 시신은 현재 단국대학교 야산에 버려졌고 김개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임실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지며 그 외 손화중, 최경선 등의 경우는 아예 행방이 묘연하다.(그대로 암매장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런 까닭에 현재 정읍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김개남의 경우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임실군 학암리 야산 일대에서 2010년과 2011년 시신을 찾기 위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합작해 우리나라 농민들의 피의 강을 흐르게 만들었던 참 슬프고 아픈 우금치 전투. 그들이 가졌던,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탄생한, 너무나 번쩍이는 종교이자 철학 '동학'.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누군가 내게 굳이 종교를 갖겠냐고 물으면 나는 단연코 '동학'이라 답할 것이다. 벽에도, 쇠창살에도, 어디에도 도사리고 있었던 흡뜬 눈동자들을 잊을 수 있을까? 그 눈동자들이 지금은 모두 없어졌을까? 아니, 세상 어느 곳곳에도 남아 민주주의와 인내천을 부정하는 세력들에 더욱 부릅뜨고 향해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감시다. 이 애달프고도 필사적인 감시의 눈동자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할 때, 각자의 삶에서 무심코 지나갔던 행복과 사랑과 안전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난 몇 개의 큼직한 사건사고들을 통해 깨달아 왔다.
비단 우금치전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사건 속에서 장렬하게 피흘리며 죽어갔던 목숨들을 과연 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비록 큰 일을 해내지는 못할지라도 늘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이고 살아가려 한다. 현재는 내가 처한 환경과 일터에서 작은 모습으로 구현해 내고, 혹 기회가 된다면 주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가르치며 살아가는 길 밖에는 없는 듯 하다.
한이 서린 전봉준의 저 눈동자를 잊을 수 없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