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음식을 밀어내기 시작했던 건 김광석 거리의 어느 떡볶이 집에서부터. 속이 좋지 않았는데 친구가 안색을 보더니 활명수를 사 주었다. 마시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답답한 느낌과 미식거림은 심해져만 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멀미에 강하지 않은 내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닐봉지를 준비하려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고 출발 시간이 이르러 와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 네시간 반 동안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땀이 범벅이 되었지만 차내 에어컨이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메스꺼움과 발열, 오한이 함께 밀려들었는데, 이번의 괴로움은 잠깐의 쉬는 타임조차 주지 않았던게 전의 것과 다른 점이었다. 보통, 이전의 고통들은 움찔하며 고통을 넘겨내면 몇 초 가량은 통증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몇 초의 찰나에 나는 다시 움찔할 준비를 하며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었지만, 이번의 것은 그 몇 초의 텀 조차 주지 않았다.
네 시간 내내 검은 얼굴이 되어 가쁜 숨만 몰아쉬자, 내리 잠을 자던 옆 사람도 깨더니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보통은 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도, 이번에는 마중을 나오시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 안색을 보고 놀라셨는지 바로 약국으로 향하셨다.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병원이 없었고, 나도 응급실을 갈만한 통증은 아직 아니라고 판단했다. 약사 할아버지가 아까 마신 활명수와 알약 하나를 또 주셨다. 먹었으나 역시 효과가 전혀 없었다.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다짜고짜 내 팔을 잡더니 여기저기 지압을 하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핸드폰으로 이것 저것 검색을 하시더니 다짜고짜 그 민간요법들을 내게 시행하셨다. 사실 몸이 부셔질 듯이 아팠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장난으로 웃으며 넘겼다. 사실 내가 아프다는 말에 핸드폰도 잘 못 다루시는 분이 그렇게 독수리 타법으로 검색을 하고 이것저것 소개해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짠한 이유였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게 물을 끓여주셨고, 나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오한이 심해져 얼른 내 방 이불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합동으로 내 팔을 하나씩 잡으셨다. 당신들의 침대에 전기매트가 있으니 잠시 누웠다 가라는 것이었다. 참 오랜만에 침대에 가족 모두가 누웠다. 아픈 중에 참 정겹다는 느낌과 함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죄송하게시리 누워있는 내내 이곳 저곳 안마도 받고, 끓여주신 뜨거운 찜질기로 등과 배도 데웠다. 내가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아프니까 좋다. 앞으로 많이 아파야겠네요."
두 분이 잠드신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내 방으로 왔다. 방으로 오는 그 짧은 길이 너무도 멀었다. 현기증이 나 주저앉으면 이내 괜찮아지곤 했다. 온 몸을 중무장한 채 누웠는데도 추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끙끙대며 누워있는데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는 나의 배에 손을 얹으시고 중얼거리며 기도를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30분이 넘게 기도를 하셨다. 꾸벅 꾸벅 졸기도 하시며, 그렇게 기도해 주셨다. 어느새 주름이 많아진 어머니의 기도하는 얼굴을 몰래 가만히 보며, 나는 평소에 무뚝뚝하신 어머니가 어쩌면 나를 좋아하고 계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제 처음으로 해 보았다.
아플 때에야 느낄 수 있는 사실들 아니겠는가. 사랑과 같은 감정. 가족애...등. 누군가 슬퍼할 때 그 슬픔을 내가 다 졌으면 좋겠는 마음이 사랑 아니겠는가. 누군가 아파할 때 내가 통째로 그 아픔을 짊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머니가 가시고 자정을 넘긴 시각부터 제대로 된 고생길이 열렸다. 미식거리는 느낌은 사람을 제대로 지치게 한다. 차라리 몸 외부에 상처가 나면 아무리 큰 상처도 그 부분만 아프니 그 쪽에만 신경을 쓰면 되지만, 속이 니글거리는 느낌은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사람의 기분, 감정까지 상하게 한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와 천천히 탈진을 시키는 것이다. 앉아도 괴로웠고, 누워도 괴로웠다. 신음을 멈출 수 없었고 새벽 한 시경부터 내 안의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는데, 구토는 그 날 아침 병원으로 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현재는 구토를 너무 많이 해 식도가 다 부은 상태여서 침을 삼키거나 말을 하기가 힘이 든다. 부모님이 내 구토하는 소리에 잠을 깨실까봐 물을 틀어놓고 구토를 했다. 구토에 실패할 때에는 명치 끝에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 찾아왔다. 가슴을 움켜잡고 가만히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새벽이 깊어가며, 점점 견딜 수 없는 시간들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서는 온갖 미사일과 폭탄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나는 다음 번 구토를 하러 가기까지 웅크려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부모님을 깨울지 말지 참 고민을 많이 했다. 이제는 응급실을 가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님을 깨우러 거실에 나갔다가, 한참을 소파에 앉아 고민하고는 방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잠을 자는데 깨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격 상 자고 있는 사람들을 잘 깨우지 못한다. 학교에 다닐 때도 선생님의 명령으로 자는 아이들을 깨울 때 참 힘이 들었다. 그 아이 입장에서 일어나는게 얼마나 힘이들까 생각해보니, 깨우는게 참 미안했던 것이다. 혹 내가 결혼을 해도,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얼마나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던지, 결국 새벽 다섯시 쯤에 어머니가 깨셔서 나의 상태를 물으셨다. 안색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어머니께서 응급실을 알아보려 병원에 여러군데 전화를 해 보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응급실을 통해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만 5만원 가까이 된다는 이야기에, 이내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병원이 문을 여는 시각까지 참아봐야겠다 생각했다.
고통을 참는 도중에, 법륜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여러 불교의 가르침들이 작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색즉시공공즉시색, 모든 색이란 공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내가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아파할수록 내 고통을 점점 키우는 꼴이 되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래서 찾아오는 고통을 무시하고, 느낌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오직 누워있는 '나'를 직시해 보기도 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와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모자란지라 모든 고통을 넘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파김치처럼 초죽음이 된 상태인지라, 말처럼 그리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요사이 아팠던 기억들, 혼란스러웠던 마음들, 소중한 이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었던 것들을 죗값으로 치르며, 모든 것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는 듯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피를 뽑고, 소변 검사를 한 뒤, 엑스레이를 찍고 주사를 맞았다. 누워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주사도 맞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으니, 오늘 오후부터 구토가 멎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현미와 감초 등을 넣고 끓여주신 숭늉을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은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미음도 입에 대지 못하고 이온음료와 물만 마시는 정도이지만, 열이 내려가고 미식거림이 덜하니 숨 쉬는게 고통스럽지 않고, 다시 살만 해졌다.
내가 살아있다. 나는 죽을 듯이 고생스러웠으나, 병원에서 나오는 결과는 또 심각한게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 합을 이루어 맹공을 퍼붓다 보니, 이번의 싸움은 더욱 견디기 버거웠던 듯 싶다. 실제로 나는 아픈 중에 늘 글을 쓰곤 하는 사람이지만, 유독 이번에는 글 조차 쓰지 못했다. 정말 아플 때는 글을 쓸 여력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된 셈이다.
이제는 거의 지나갔기에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다. 오랜만에 긴 일기를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