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살았던 약 6개월 남짓의 삶은, 내게는 극단의 양 끝을 출렁거리며 몹시 위태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별천지 가운데서 그곳 풍경을 끝없이 시선에 담아냈던 꿈과 같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세계 각지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 짧고도 가벼운 인연을 맺으며 나의 생채기를 치유해 나갔다.

 

 남의 차를 타고 누비던 창밖 풍경이었지만, 그곳은 고속도로를 달리면 둥근 초원 위 양떼들이 흐드러지게 퍼져 풀을 뜯고 있었다. 동네 길을 지나면 심심치 않게 운하가 나오고 물 위에는 요트들이 줄지어 선박해 있었다. 거기에는 높은 건물이나 교통체증, 짜증을 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보도블럭보다 녹색 잔디와 나무들이 더욱 많았던 길가 사이에는 키위새들이 평온하게 걸어다니고 있었고 산책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맞추며 인사해 주며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은 외곽진 곳 어느 그늘에 앉아 한참을 사색했던 적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조깅을 하다 만난 할머니에게 내가 하고 있는 숙제거리를 열심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내가 홈스테이 했던 집은 나무들이 울창한 어느 길가에서 우회전 하여 나온 오솔길을 따라 얼마 가지 않아 나오는 커다랗고 정겨운 세 척의 집 중 하나였다. 그들 부부는 이민 1세대로서 대형마트의 야간 청소부일을 하고 있었으나, 사업이 성장하여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아들 두 명은 각각 대학생과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늦둥이 딸은 이제 막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그 아들 둘은 정말 키가 컸고 모델과도 같았다. 얼굴은 첫째가 더 잘생겼고 키는 둘째가 조금 더 컸다. 허나 그들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었던 부모의 뜻을 따를 마음은 없어 보였다. 첫째는 본인의 꿈을 한국에서 PC방 사장을 하며 게임을 원없이 하는 것이라며 내게 진지하게 귀띔해주었고, 운전을 하면서 옆차에 괜히 시비를 걸고는 뻑큐를 날리기도 하는 다혈질이었다. 둘째는 형과 함께 늘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그들의 아버지는 고혈압이 굉장히 심해 약을 먹고 있었고 말괄량이 딸은 감정기복이 심해 가늠을 할 수 없는 천방지축이었다. 

 

 그 다섯 가족은 주말이면 함께 소파에 앉아 무한도전을 함께 보자며 나를 불러내곤 했다. 그 당시 겉으로는 웃으며 보았으나 마음은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던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회차를 이야기해 보자면, 바로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특집이었다. 박명수와 지드래곤의 '바람났어', 유재석과 이적의 '압구정 날라리' 등의 노래 등이 TV를 통해 머나먼 타국에 있던 나에게도 전해졌었다.

 

 내가 이렇게 장황히도 뉴질랜드에서의 짧았던 체류기간에 대해 서술하는 이유는, 그 후로 더는 그와 같은 풍경을 마주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나 또한 이제야 나의 성향에 비춰보아 국내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서도, 내 주변을 둘러싼 갖가지 소소한 그림과 소리들이 내가 그곳에서 느꼈던 것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너무도 처절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곳은 한창 우울의 계곡 한가운데에 빠져 있던 나 조차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모든 것이 푸르렀고 느리게 흘렀으며 사람과 노래 새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자 시였다. 나는 이십대 내내 그 꿈과 같던 풍경을 품었고 그와 비슷한 사진을 찾아 내어 나무가 울창한 어느 길가 속 나의 집에 홀로 사는 삶을 기대에 찬 상태로 기록하곤 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 그림과도 같은 집은 커녕 아파트가 빽빽한 7단지 속 어딘가 어느 층에 세들어 살면서 또 다른 아파트밭의 한 호수를 위해 청약을 꿈꾸는 30대가 되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3층짜리 프라자 건물에 수십개의 간판이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아웅다웅 싸우며 자랑하고 있고 양옆 길가에는 수많은 차들이 소음과 매연을 뿜으며 거리를 누빈다. 코로 숨을 들이키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옅은 담배냄새와 매퀘한 쓰레기향이 코를 스치고, 사람들은 눈인사 하나 없이 저마다 바삐 갈길을 간다. 마치 자기를 둘러싼 한 뼘짜리 공간과 아이만이 가장 소중하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표정을 하고서는 말이다.

 

 TV를 틀면 지겨움도 넘어서 초연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정치판 뉴스들과 가십거리의 자극적인 내용만이 주를 이루고, 유튜브 컨텐츠들도 지극히 우악스럽다. 내가 느낀 한국인은 정서 상 포악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비단 중국인 만큼 심하진 않으나, 일본인 만큼 조용하지도 않은 그 어느 사이의 느낌이다. 그들이 자아내는 모든 말과 행위, 표정들이 우리 민족의 시끄럽고도 표독스러운 그 왈가닥스러움을 대변한다. 

 

 조용하고 맑은 곳을 찾아 숲 속 카페를 가도 아줌마와 노인들의 점령터가 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며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고요스런 곳이 산 꼭대기 말고는 없다는 내면의 자각이 있어서 아닐까 싶을 만큼. 그래서 나는, 그나마 사람이 없었던 제주 삼달리 어느 바위 위에서, 잠시 편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어떤 여행이나 데이트 등에서도 기억에 남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나의 시간과 공기, 그 모든 분위기를 잠시 천천히 흐르게 할 수 있는 단 한가지가 있다. 이것은 이 시끄럽고 제멋대로이며 깜빡이 없이 갑작스러운 나의 오늘 가운데에서도 아주 잠시의 단편 조각을 단숨에 반짝거리는 색채로 돌변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기 직전 까지도 이것에 미쳐 있기로 오늘도 결심한다. 

 

 나는 죽기 하루 전날이라도 이것에 마침표를 찍기 원한다. 뭇 사람이 들었을 때 단숨에 감정과 분위기를 바꾸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곡을 하나 완성하길 원한다. 현재 나의 상태가 좋지 못해 큰 꿈을 꾸지는 못하지만 나의 불씨는 도저히 꺼트려지지가 않는다. 나는 남은 절반의 인생은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고, 음을 들려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음악을 만들고 들려줄 수 있다면 이 곳에서라도 지금처럼 살 수 있다. 아무리 괴로워도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라던 가사처럼, 나의 살아갈 날과 그 동력은 음악인 것이다. 재능이 없다면 배움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끝단 까지 가 보겠다. 그리고 서랍장에 한껏 남겨놓고 죽겠다. 만일 이것이 신이 동의하는 항목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나는 일찍 죽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 그것은 흠모했던 모든 것이 잡히지 않고 나를 경멸하며 떠나갔을 때 유일하게 나에게 돌아와준 것이자, 잠시나마 내게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어주었던 속삭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