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누구나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나의 삶을 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세운 기준보다 더 큰 욕심에 기인한 것일수도 있다. 언제나 더 큰 것만을 바라는 기질이라면 더더욱.

모든 것이 계획했던대로 순조로이 진행되고 매일을 최선을 다하며 목표를 일구는 끈질김을 보유한 이들이 정말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자신을 마치 기계처럼 소개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 말이다.

존재한대도, 존재하지 않고 순 거짓말장이들이라도 나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이고 내가 일생토록 주인공인 이 연극이다.

나의 마음이 편하자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니,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뭔가 대단해보이는 것들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비춰지고, 드러난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극 중 배역들이 각각 역할에 맞추어 자리를 채우듯 그렇게 늘 보여지고 발견된다.

나는 이들이 마냥 대단한 무언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그들 또한 본인이 주인공인 인생을 사는 배역일 뿐이고, 한정된 시간을 살다 간다.

그들 역시 만일 괴한이 나타나 음식과 물을 빼앗고 며칠간 놓아두면 목숨을 잃을 사람들이다.

그들도 하루 세 번이상 각자만의 공간에서 노폐물을 배설하고 시시콜콜한 감정에 요동하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 중에는 어쩌면 처음부터 멋져보이는 성취를 계획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중요한 선택을 멋져 보이는 방향으로 했을 수도 있고,

아예 태어나보니 출발선이 달랐던 케이스였을 수도 있다. 

내가 하는 말의 요점은, 그들의 가운데 '운'이라는 요소가 생각보다 많은 지분을 차지했을거라는 사실이다.

 

2.

'운'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운을 열망한다. 참으로 매혹적이다.

나의 노력에 관련 없이 찾아오는 묘한 조건들의 일치, 그것들이 정렬되며 터지는 짜릿한 잭팟.

애석하게도, 운을 얻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배울 수 없다. 

혹자는 말한다. 운도 그릇이 완성되어야 받을 수 있다고. 운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글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같다. 

그가 이야기하는 그릇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해서 작정하고 들어오는 운떼를 비켜가게 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인가?

한편, 본인에게 들어온 운, 다른 말로 기회를 잡지 못하는 케이스 또한 여럿 봤으므로 이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신해철이 하늘에 가기 며칠 전, 그는 이런 강연을 했다.

"인생의 큰 비밀 하나를 설파하죠... 성공은 '운'입니다."

그의 인생 마디마디를 몇 줄로 짐작할 수 없지만, 그저 밖에서 본 바 나의 입장으로서...

대학생 시절 가요제에 나와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비교적 성공을 쉽게 거머진 그, 

그러나 숱한 실패와 좌절, 안티들의 비난, 그로 인해 겪었을 상실감 속에서 날로 단단해지던 그가 할 수 있었던 진솔한 조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의 마지막 또한 매우 좋지 못한 인연과 운으로 비통하게 끝나 버렸다.

그는 같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나간다. 기억에 의존해 쓰기 때문에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지만...

"성공은 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태어날 때 이미 운을 다 한 거라고 봐도 됩니다. 당신의 인생은 보너스 게임이에요. 하고싶은 거 하고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나에겐 언제쯤에야 성공의 운이 찾아오나 헛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고 보여진다.

운이나 성공의 중요성을 낮추고 내 생활, 내 바운더리 안에서 각 사건들과 물결을 즐기며 삶을 게임처럼 사는 것이

저 무리지어 가는 개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우리네 삶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처세법이 아니었을까?

 

3.

나는 수개월 전 묘한 책 -트랜서핑을 읽고 설레었다.

나는 현재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지 못하고 있으나, 아주 천천히 돌아갈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책은 나의 인생의 등대도 아니었고, 이제 내게는 재미있는 처세술이나 심리학 책 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책과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애정이 있다.

나는 책을 보던 몇 달 간에 스트레스 수치가 매우 낮아짐을 느꼈고, 의미있고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더불어 언제나 그렇듯 이것을 잘 정리하고 살을 붙여 설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책은 무료하고 어쩌면 가혹하다 느껴지는 오늘의 우리의 삶을 그나마 재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준다.

단순한 재미보다는 극심한 스트레스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안정이나, 숨 트임에 더욱 가깝지만 말이다.

 

4. 

오늘 제주에 사는 어느 농부님에게 반가운 댓글을 남기며 귤을 주문했다.

나는 단 몇마디를 적기 위해 족히 30분은 더 고민했던 것 같다.

그녀는 이곳, 나의 일기장에 거의 신처럼 묘사되어 있는 존재다.

그녀는 약 5-6년 전 내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었고, 나는 그 말에 일어섰으며 성장했다.

무작정 제주로 떠났던 그해 겨울은 내겐 여행도 나들이도 아니었다.

나는 제주에서 몇 가지 직업을 정하고 면접을 보았으며 돌아갈 비행기표도 사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면접을 보며 알았다. 나에게는 제주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갈 그 마지막 연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성산 앞바다에서 어두워지도록 돌에 부딪치는 파도만을 보다가

사람들이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 위험한 지형을 넘어 앉아 아래만을 내려다 보았었다.

그 날 새벽이 짙도록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이 나를 살렸고

내게 종이컵 한 개 분량의 연료를 부어 주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근사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은 이성적 매력도, 단순한 흥미나 끌림도 아닌 그 위의 것이었다.

마치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 느꼈던 심정이라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또한 6년 전에 머물러 있는 나의 시선과 마음일 뿐, 그 사람은 나만큼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2-3년 전에도 그 고마움에 선물을 보내거나 귤을 주문했던 적은 있지만.

그래서 댓글 창에서도 몇 줄을 줄이고 또 줄였다.

그럼에도 돌아온 답변은 나를 당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친절하지 않았으며 너무도 딱딱한 짧은 인사로 글을 마무리했다.

내 마음의 크기와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반응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는 다시금 인정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녀도 변했고, 나도 어딘가 변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변화를 인정하며, 그들의 변화 또한 인정한다.

나는 그저 현실에 사는 그가 아닌 6년 전 그 매력적인 농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녀 이외에도 과거에 박혀있는 많은 이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을 현재 보고싶지는 않다.

그들은 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