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순익 천 만원을 달성했다. 

자랑할 데가 없어서 여기다 쓴다.

나는 이 사실을 -아내를 제외한- 나와 친분이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그정도 혜안은 있으니까...

 

월 천만원을 벌겠다는 건 나의 백일노트 중 두 번째의 목표였다.

아래 사진에 보이다시피 '24월천' 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2024년도 초에 반드시 나는 월 천만원 이상을 벌고 있다는 현재형의 문장을 줄여 쓴 것이다.

참고로 나는 백일노트를 시작한지 백 일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쓰고 있다.

또한 목표 한 가지당 백 번을 쓸 때에는, 해당 목표에 대한 심상화를 꽤나 구체적으로 한다. 

따라서, 그 시간은 꽤나 재미있는 시간이다. 아주 즐겁고 신선한 단편영화 한 편을 몰입해서 보는 기분과 똑 닮았다.

하지만 목표가 4개이다 보니 아무리 손이 빠르고 능숙해져도 20~30여분이 걸린다. 

한 번 시작하면 그 정도의 시간은 빠르게 삭제되기 때문에, 바쁜 날은 이마저의 시간도 내지 못할 때가 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그 어떤 의무에도 종속되거나 구애받지 않는다. 

관측의 여정은 즐거운 과정이고 가벼운 일이다. 거기엔 부담이나 억지가 없다.

모든 이벤트들은 순서를 따라 내 앞으로 정렬되어 온다.

 

 

내 목표는 24년도에 월 천을 버는 것이었지만, 난 23년도 한여름에 달성하게 되었다.

김승호 회장이 그런 말을 했던가. 

목표 중 돈에 관한 것이 가장 빨리 이루어진다고.

일반적으로 타인이나, 관계나, 다른 매개체와 요소들이 얽히고 설켜,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다른 목표들에 비하면 돈은 무생물에다가 그 어떤 성질을 갖지도 않은 독립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끌어당기는 난이도가 다소 쉽다는 말도 어디에선가 읽거나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 기분이 좋은 편이지만 그렇게 고조되거나 고양된 상태는 아니다. 

일부러 줄타기를 하거나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기분이 그렇게 된다.

내가 -물론, 단기목표에 속하지만- 인생에 수많은 갖고 싶은 것들 중에 단 네 가지를 추려 하루에 백 번씩 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사하며, 수시로 기분까지도 느끼려 노력했던

바로 그 일중 하나가 오늘,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왜 기분은 뛸듯이 기쁘거나 흥분되지가 않고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행복'이라는 감정에 오히려 가까운 성질이 아닐까 느낀다.

물론 나 역시 이번 달 순익이 천만원이 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것을 엑셀로 보았을 때,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것은 날아갈 듯한 감정이었으며, 나는 당장에 와인과 잔을 준비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이내 제자리에 다시 앉았고 남은 몇 가지의 일들을 마친 후에 이 기록을 남기려 컴퓨터를 켰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흥분과 쾌감 대신 알 수 없는 고요하고 편안한 느낌 속에 있다.

사람들 중 몇은 극도의 쾌감과 짜릿한 전율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성질은 정적이고 평온한 상태의 지속에 가깝다.

고된 하루와 오래도록 지친 시간 속에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한 무탈한 그 시간들 말이다. 

강한 쾌감과 갑작스런 감정의 고양은 마치 손 세정제를 바르는 것과 같이 휘발성이 아주 높다.

그런 일들이 생애 중 얼마나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다'는 말을 그 때에만 쓰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흥분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몇 가지가 더 있다. 

일반적으로 내가 백일노트에 적는 목표들은 대개 몇 개월, 혹은 1~2년 내로 이루어지길 원하는 단기적인 목표들이며,

'리얼리티 트랜서핑' 책의 용어를 빌리자면 과정의 심상화, 연결고리에 대한 심상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정의 성취 역시 짜릿한 것이 맞지만, 나의 최종목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나는 최종목표가 이루어진 그 후의 일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따라서 어찌보면 이 성취는 내게 있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면이 있으므로 평정심이 드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사업의 특성 상 월 순익이 똑같이 유지되리라는 보장 또한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이 성취가 일회성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관측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도 쏟을 예정이지만

그 과정 중 필연적으로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있을 때 마주하게 될 잠시의 머뭇거림과 멈춤 또한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이것을 실패, 파산 등등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현재 일에 더없이 만족하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해도

멈추거나 포기할 상황은 선택지에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런 실패나 장애물의 상황에 그닥 관심도 두려움도 없는 편이다.

실패가 오면야 그 때 수습에 들어가겠지만, 오지도 않는 손님을 언제 오나 생각하고 있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 아닌가?

 

 

백일노트에 관해 조금 더 기록해두고 싶다. 

현재 백일노트 중 세 번째의 목표도 이루어지기 직전에 와 있다.

이 목표는 나의 체중의 감량과 몸의 형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현재 나는 약 200g 정도를 남겨놓고 있다.

올해 4월 16일에 시작하여 7월 30일 현재 15.7kg을 감량했다. 

0.2kg을 남겨놓고 그 정도면 달성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관측할 때 내가 체중계에 오른 순간 나타나는 해당 숫자에 대한 상상을 했기 때문에, 

0.01kg 라도 숫자가 넘어버린다면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백일노트에 7월 중으로 해당 체중이 된다고 써 왔다.

내가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 다시 잰다면 7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 목표마저 이루어져 있을지는 궁금하지만,

나는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애초에 백일노트에 쓴 목표들이 이렇게 단기간(3~4달)에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백일노트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시다 히사쓰구, 유튜버 켈리최, 김승호 회장, 하와이대저택 등)이 이야기했다.

백일노트는 '백일 동안 소원을 쓰면 모두 들어준다'는 미신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쯤은 모두가 알 것이다.

나 역시 백일노트를 시작한지 100일은 훌쩍 넘겼고, 7월이라는 목표기간 설정 또한 쓰는 도중 수십일이 지나 추가한 것이다.

나는 특이하게 백일노트를 쓰는 100일 동안 문구나 기간, 심지어 목표 자체가 바뀌어 버린 일도 있었다. 

이것을 유독 긍정적으로 보았던 이유는,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데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마음대로 설정해 놓은 그 기간에 전혀 구애받거나 억압되지 않았다.

기간 설정은 심상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 성취에 대한 기간은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이미 이루어졌고, 언젠가 가시적으로도 보일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무엇보다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진퉁으로 정말 경험해가는 중에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 있어 백일노트는 그 중요도를 따지자면 저 후순위에 가깝다. 

내가 현재 가장 중심으로 두고 있는 부분은, 눈을 뜨고 숨을 쉬는 그 모든 순간의 나의 '깨어있음'이다. 

다르게 말하면, 눈을 뜨고 있으나 진정한 나는 눈을 감고 있지는 않은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나 장님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닥쳐오는 예기치 못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주식 그래프의 변동창을 보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누가 자신을 건드리면 즉각 화를 내고, 고되면 고된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대로(아니, 심지어 불행감에 익숙해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깨어있는 삶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쓰고 있으나, 참으로 나 또한 영성가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 또한 하루의 과정 중 굉장히 수많은 순간에 바보같이 몰입하게 되어 행복을 깬다.

나는 즉시 돌아오려 시도한다. 그 평온에 강박적으로 얽매여 애를쓰지는 않지만, 그저 다시 돌아오려고는 시도한다.

내가 돌아오고자 하는 평소의 이상적인 삶은 미숙하나마 좀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한 동기가 명백하다.

- 눈에 보이는 현실이 실제(모든 것)가 아니고 그저 게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그 외 부정적인 모든 감정들에서 초월해 있다.

- 마음과 행해야 하는 일이나, 입을 열어 말하는 그 모든 행위가 가벼우며, 잔잔한 행복만이 나를 감싸고 있다.

-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로 걸어가는 오늘이 선물이나 보너스 같다.

- 그래서 작고 미세한 것들에게 까지 자꾸만 감사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거울이다.

온갖 사람들이 개미처럼 우글대며 바삐 오고가는 차량들, 온갖 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한 하루의 그 모든 풍경은

그저 빛에 반사되어 반응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사후적 결과에 가깝다.

내가 책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나 또한 주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의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실체가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하게 안내할 수 있다면 나부터도 시원하고 좋겠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사고하고 있는 바는, 실제의 세계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 따르면 이렇게 표현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한 무한대의 가능성 정보장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구역들 중 한 개만이 이루어진 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나는 복잡한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복잡하게 들어가지 말고 아주 간단히 말해서, 세상이 정보장, 그리고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내가 에너지를 송신, 수신하는 과정에 의해 현실에 영향을 천천히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알게 된 사실을 시시 때때로 인지하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의 수많은 목표들 중 공식적으로 기재했던 단기적인 목표 한 개가 성취되었으며,

또 한 개는 이루어지기 몇 시간 남지 않았고, 

그 외 중장기 목표들 또한 전과 비교하여 부쩍 가까워졌다.

 

백일노트에 적히고 있는 4개의 단기목표를 소개하자면...

 

첫 번째 목표는 어떤 사람과의 일회성 재회를 통한 내 마음의 치유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짐에 있어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관측의 여정에 있어 여러 명의 스승을 두고 있는데, 물론 내적교감을 통한 나만의 스승들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타인, 또는 관계에 있어서의 소원은 불필요하거나 이루어지기 어렵다거나, 심지어 위험하니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등의 조언을 한다.

각 사람은 고유한 소우주와도 같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바꾸거나 그와의 관계나 사건을 조종하려는 일종의 에너지적 차원의 시도는 나로서도 꺼림칙한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상대에 대해 조종하거나 해를 끼칠 마음이 없으며, 심지어 관계에 대한 전환이나 회복을 바라고 있지도 않다.

나는 그저 어느 한 날 우연한 날에 일별(一瞥, 잠깐의 눈맞춤)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나는 그와 하루 저녁의 잠깐의 식사를 관측하고는 있지만,

그저 먼 발치에서 내가 그에게 발견당하거나 파악당하기만 해도 나는 이조차 성취로 여길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러한 사건을 경험하거나 비슷한 사실을 듣기만 해도 나는 나의 성장기에 중심적으로 나를 갉아먹었던, 

그리하여 나의 주체, 그 중심에 커다랗게 뿌리내리게 되었던 거목을 뽑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목표는 월 순익 천만원을 달성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 목표는 위에 기술했듯 체형과 중량의 변화였으며, 몇 시간 내로 이루게 된다.

네 번째의 목표는 하루, 순간마다 언제나 마음을 다잡는 종류의 목표였기에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며, 평생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라 칭해도 맞을 것이다.

 

넷째 목표는 초반에 '나는 언제나 당당한 사람이 된다.' 라는 문구였다.

그러다가 70여일 쯤 들어섰을 때, 나는 나의 에너지 순환에 관련한 목표로 문구를 전환하게 되었다.

의미는 비슷하다.

 

내가 언제나 당당하지 못하게 주눅들고, 의기소침한 자세로 살아가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도리어 나는 사람들이 마치 내게 힘이나 근엄함이라도 있는 양,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오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살아온 편이다.

어떤 이는 내가 까불며 서글하게 웃기고 있지만 실제로 숨겨진 무서움이 있을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많은 동생들도, 학교 후배들도, 군대 후임들도, 직원들도 내가 아무리 순둥하게 다가가고 잘해주려 애를 썼지만, 내게 선을 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도리어 그 점들이 때론 아쉽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다른 의미로써의 당당함은 언제나 갈증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향하여 결국 교육과로 전공을 삼게 되었다.

그 사실이 향후 서게 될 아이들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고 느껴, 대학교 3학년 시절 일찍이 준비하던 고시를 때려쳤다.

물론 내가 졸업 후까지 3~4년 동안 공부를 지속했어도, 경쟁률이 워낙 높은 시험이니 붙을 수 있었겠는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털어놓자면 정말 저 사실 하나 때문에 교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교사가 되기 원했다면, 공립학교 말고도 연줄이 닿는 사립학교와 이미 취업 보장이 된 대안학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교사 상은 아이들에게 꿈을 따라 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인데,

내 인생이 이미 꿈을 버리고 하향 지원하여 교단 앞에 서 있게 된 이상,

아이들에게 어떻게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유였다.

그 당당함이 내겐 아주 기이할 정도로 중요한 지표였기 때문에, 나는 당당함이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당당함은 어떤 척을 해서 나오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론, 현재는 몸의 자세와 척으로도 일정부분 이상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세상 아무도 몰라도, 나 혼자만은 스스로 알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그 당당함의 바이브가 있다.

어찌보면 '떳떳함'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내 말에 거짓이 한 톨이라도 있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소개하거나 발표할 수 없다.

나의 연주에 조금이라도 불안감이 있다면 나는 불특정 다수 앞에서 피아노를 칠 수 없어 덮개를 닫고 일어선다.

이는 나만이 가진 강박이고, 어찌보면 자유롭지 못한 나의 완벽주이적 특성이자 기질이다.

 

그러므로 내가 백일노트에 적은 그 당당함은, 

과거 동안 나의 기준에 비추어 실패와 방황의 소용돌이 속에 잃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그늘로 인하여

그 누구의 앞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현재 이루어놓은 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함과 동시에, 향후 이루어나갈 것들에 있어 당당함을 되찾자는 일종의 내면적 목표였다.

 

또한 그와 동시에 일반 사람들 앞에서의 사소한 당당함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의 다소 또렷한 인상이나, 어릴적 운동과 유전적으로 얻은 약간의 덩치가 있는 남자라는 사실 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경험은 쌓여 왔지만,

나는 원최 극 내향성을 가진 사람이고 (이로 인한 처세술이나 연기에 있어서는 나름 익숙하다 느끼고 있긴 했지만)

거의 모든 순간을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가운데 내 진정한 내면은 그리 당당하지 못한 모습이 늘 발견됐기 때문이다.

나는 성격이 보기와 다르게 굉장히 민감한 편인데,

나의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저 사람에게 조금의 상처나 피해가 가는 것에 대해 늘 예민해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일에 조심하고 있으며, 너무도 쉽게 미안해지고, 나의 손해를 통해 타인을 편안히 해주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말은 휘발성이 강하고 많은 경우 실수를 낳는 원초가 된다고 생각하여 입을 함부로 열지도 않는다.

나는 그 정도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당당함을 목표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일같이 커피를 주문하는 자세와 목소리부터 당당함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주문을 받는 알바생이 실수를 하면 나의 등장 자체가 그에게 너무도 미안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백일노트를 쓰면서 외부적 모습은 이전과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내면에서의 이러한 전쟁들은 어느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당당함에 대해 목표를 쓰고 있다. 

내가 요즈음 유행하는 힙합 가수들처럼 만큼 오글거리게까지 겉으로 당당한 척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기질을 넘어선 정도까지는 당당함의 기본적 요소를 갖추고 싶다.

 

그러나 백일노트를 쓰던 중 나의 내부에너지 순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몸소 직접 하나 둘 체험했다.

이는 가벼운 명상과도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는데, 숨의 호흡과 잠시의 시간을 들여 관측을 하는 것만으로 몇 가지의 부정하기 어려운 체험을 했다.

이 글에서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내부에너지를 키우고 순환강도를 올리는 것만으로

나는 사소한 일에서의 당당함을 넘어선 유머와 여유 등 까지도 얻게 되었다.

근래 특정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있을 때, 꽤 쏠쏠하게 이 에너지를 이용하며 재미를 보고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일노트의 네 번째 목표는 당당함에서 에너지의 가득참과 팽창, 순환에 관한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목표를 적음과 동시에 호흡, 관측, 명상 등을 함께 수행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 있어 만족도가 매우 높다.

 

 

관측의 여정은 어렵지 않다.

나는 그저 작은 성취의 일부분을 얻었을 뿐이지만, 앞으로의 삶을 더 큰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이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너무나도 쉬운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 관측의 삶을 이어나갈 동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끌어당김을 고행의 일종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나 또한 수많은 세월 동안 그래 왔었다. 억지로 좋은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하며

와닿지도 않는 감사를 하다가 결국 주저앉고 한동안 이 삶과 담을 쌓은 적이 이미 수 차례다.

당시 나는 이러한 이론과 설명들에 대해 '사기'라고 부르고 다녔고, 추종자들의 지능 또한 매우 낮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올바른 길을 따라 쉽게 받아들인다면, 수영하듯이 관측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참신한 인사이트나 영감 등이 떠오를 때,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얼른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다.

이 중 주로 나만의 확언 같은 것들을 만들어 적기도 하는데, 나는 몇 주전 다음과 같은 확언이 떠올라 기록해두었다.

'나는 쉽게 놀면서도 돈을 번다.'

내가 이 돈을 벌기 위해 수없는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쏟아부었을까?

나는 솔직히 말해, 집중했던 하루 서너 시간을 제외하곤 정말 놀면서 이 돈을 벌었다.

내가 오전 7시가 조금 넘어 회사로 출발하여 밤 10시반이 넘어 나오던 삶에 그대로 있었다면 쳐다도 보지 못했을 금액이다.

 

관측한대로 된다.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만나기까지 반 년이 조금 덜 걸렸다.

나는 여러번 말했지만 내가 실험체가 되기로 했다.

현재까지의 실험은 성공적이다. 

데이터는 여지없이 쌓여간다.

예외는 발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