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마음공부와 같은 것을 입문하면서(마음공부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고 싶지도 않기에), 

영혼의 소리 듣기, 끌어당김의 법칙, 가정의 법칙 등 옛날에 나로선 쳐다도 보지 않고 무시했을 법한 것들을 붙잡고 살고 있다.

일찍이 내가 전래동화속 이야기같은 이것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기 시작한 건(나는 한번 물면 끝까지 파고 드는 성격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모종의 사기와 같은 것일 지라도 나에게 결론적으로 득이 될 거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해 날리는 물질적, 시간적 에너지와 허무함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내게 남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 나는 전에 모자랐던 끈기를 이용해 매일같이 같은 스탠스를 고수하고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기독교의 사기극에 속아 자그마치 20여년의 세월을 소비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실패만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대신에 나는 교회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첫 과정과 단계별 특징들을 아주 세세하게 알게 되었다. 더불어 고귀하고 존경스움을 한눈에 받으며 거의 모든 얼룩에도 까방권을 가지는 지도자 위치에 선 그들의 민낯을 또한 보았다. 무엇보다 가치 있게 얻은 것은, 신과의 교감작용이라 칭해지는 일환으로 나의 내면에서 꿈틀대던 여러 작용들에 대한 경험이었다. 한 마디로 나는 기독교라는 숲을 조망하는 동시에 울창한 나무사이 숲길을 모두 알고 있는 '객관적' 시각을 얻게 되었다.

나는 종교학, 비교종교학 등에도 관심이 많으며, 또다른 종교라 분류되는 불교의 철학에도 굉장한 흥미와 호기심이 많다. 나는 종교라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러한 나의 습관이 끌어당김의 법칙에도 다시한 번 빠져들게 만드는 주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가 통찰하기로는 사람들이 그저 생각하는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고..." 등등의 천박한 종류의 것만은 아니다.

나는 파면당한 박 전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이같은 발언을 한 것에 대해 거북함을 느꼈고, 그 사람이 주장하는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와 같은 따위의 동화스런 표현 자체가 그렇게 가볍게 소비될 수 있는 말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그 말에는 생략된 요소들이 너무나 많으며,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가 현재토록 경험한 끌어당김은 이런 것이다.

나는 '끌어당김' 이라는 표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진정 원하고 바란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제대로 관찰하고 조망하게 만들어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것.

즉, 온갖 정보의 홍수와 매체, 미디어의 파도 속에서 타자의 욕망이 마치 우리의 욕망과 분간조차 안 되는 이 시대에,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이 맞을까? 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첫번째 단계라는 것이다.

 

끌어당김을 진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 처음엔 부에 대한 동경,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등 개인적 욕망으로 시작했더라도 이내 곧 내 자체, 내 영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초반에 그 길로 가지 않는 이상, 이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고 힘이 떨어져 금방 그만두게 된다.

그 고민의 시간은 단지 한두시간으로 끝나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몇 주, 아니 몇 달도 우습게 지나가는 길고 질긴 과정이 되어버린다. 때로는 바나나를 손에 쥔 원숭이 처럼 너무나도 내게 매력적인 것이 진정 내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는 자각 때문에 괴롭기까지 하다. 

 

따라서 나는 현재 이 첫 번째 단계에 거의 반 년 가까이를 머물러 있다고 느끼며, 이것이 내가 이 법칙에 대한 깊은 과정을 항햔 여정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주된 이유이다.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다음 단계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넘어서 이미 그것을 이미 가진 채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과정일 것이다.

물론, 단계별 과정이라 하여 단순히 그 단계의 것만 머물러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시중에 떠도는 여러 방법과 스킬들을 거의 전부 사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나 역시 무언가를 이미 얻은 듯 느끼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와중 개연성 있게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자 하는 삶의 조각들을 글로 쓰고, 입으로도 말하기도 하며, 내면으로 관측하거나 실제 내 눈으로 보기도 한다.

 

내게 있어 끌어당김이란, 고대 심리술사나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사상가 몇이 주장했던 목소리, 현대시대에 접어들며 파란을 일으켰던 시크릿 내용을 무지성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포함, 온오프라인 정보장에 떠도는 모든 주장들을 편견 없이 맞이하여 내게 하나씩 실험해보는 여정인 것이다.

 

나 자체가 실험체가 되어 실험해본다는 일은 얼핏 낭비와 상실 등의 리스크를 동반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서두에 비쳤듯 이것을 따라 공부하는 과정은 '지금, 당장'의 효과를 내게 가져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적용하기만 했다면, 첫 날부터 애매하고도 옅은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 날로 우울감과 짙은 염세주의가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낯선 행복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상황을 떨어져 관망하게 되는 메타인지적 시각과 현재의 수많은 장애물을 달리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장면을 당신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설명이 어려운 긍정적인 일들이 찾아오기 시작할 즈음 당신은 이것이 단순히 내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이며, 상황은 전과 비교해 그닥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그저 나의 받아들임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될 지라도, 이내 결국 그 생각 또한 틀렸다고 판단될 만큼의 객관적 환경의 변화를 발견할 것이다. (양보하여 그 환경이 내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이라해도 그런들 어떠한가. 행복감과 긍정, 감사로 가득찬 내면은 전과 비교하여  상황 자체를 걸어갈 에너지라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열심히 올라간 만큼 그만큼의 알 수 없는 힘으로 알 수 없는 시험들이 닥쳐 온다. 나 또한 며칠 전 나의 내적 컨디션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새벽길을 걸으며 잠깐의 관측으로 나 자신을 돌이키는 과정은 또다른 신비스런 느낌과 자긍심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나는 부정적 감정을 온 몸으로 깊게 느끼고 흡수되도록 살아왔으며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던 사람이었지만, 그것에 발목을 담구기 시작했을 때 빠져나오는 시도는 내게 있어 전에 없던 신선함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어려움이 있었을 때 이같이 극복했다는, 나보다 이 길을 조금 먼저 갔던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역시 이것의 진수는 내게 실패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더욱 발휘되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그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