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과 같아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꽤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하나의 장면에서(당시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미술시간에 상상 속 풍경을 그리는 시간에

다른 모든 아이들은 세모지붕이 있는 집과, 구름, 산등성이 사이에 껴있는 태양 또는 하늘에 떠있는 해를 그렸지만

나는 그것과 똑같거나 비슷하게라도 그리는 것이 싫어 아주 다른 쌩뚱맞은 것들을 그렸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멈춘 뒤 나의 그림에 주목하며 의아해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 기억이 남아있다.



나는 이 하나의 장면이 나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요약하여 비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스케치할 때 전반적으로 그리는 것들이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평범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평범하길 원하지 않다는 말 보다 남들과 같아지기를 극도로 싫어했었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겠지만, 나의 인생은 내 혼자 스케치 해나가는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변수가 존재했고, 출발선도 모두가 달랐으며, 주변 환경에 의하여 다르게 그려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었다.

그 와중에 내가 가진 용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소중했던 관계를 끊을 각오가 부족할 경우

점점 더 나의 스케치북은 나의 터치보다 타의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들이 많아졌으며, 

결국 내가 원하지 않던 세모지붕 집과, 모든 사람이 그리는 구름과 태양이 아주 못생기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그림들은 아주 얼룩지고 더러웠으며 여기저기 번졌고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림을 쳐다보기도 싫게 만들었을 만큼 그 그림들은 나의 스케치북을 망쳐 놓았다.



나는 어느 순간 내 붓을 내려놓았고 스케치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될대로 되라' 의 삶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의 내가 맞는 결과 또한 참담하였다. 

나는 원하는 것이 크게 없으니, 타자가 나에게 강력히 원하는 것들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 인생에 꽤나 큰 영향이 있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나는 나의 인생을 버렸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저 가만히 타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 결과들은 결국엔 '내 선택'이었다는 말로 돌아왔다.

그저 피골이 상접한 눈동자로 동의도 거절도 아닌, '묵인'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묵인 속에 내가 어떠한 의도적인 반대 행동들을 취하지 않았다는 결과로 모든 탓은 나에게 돌려졌으며

그 결과 또한 나에게 전부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이십대 일찍부터 삶을 끝내고자 했던 수많은 고민의 밤들을 거쳐 왔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계산 등을 통해 대체 어느 것이 현명한 행동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지금 순간에서 자살하는 것 보다, 이승에서 똥밭에 구르더라도 아주 철저하게 마지막 날까지 구르다 가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상태이다.
 
그렇기에 자살에 대한 고려는 아예 하지 않고 있다.

똥밭과 같은 거름 속에서도 이름 모를 식물은 피어나며, 쇠똥구리의 동그란 작품도 바로 거기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작품이라 칭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누군가 나의 스케치북을 읽어 주는 것 또한 내게 영광스런 느낌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살기로 선택했다면), 나는 주어진 얼마의 기간 동안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인데

대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물음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기왕 사는 것이라면 분초를 다투는 괴로움 속에 사는 것 보다는,

극도로 행복을 느끼지는 않더라도 괴로움을 아주 조금이라도 차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마지막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구속되어 있는 나의 삶이 그나마 덜 가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중에 나는 석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외 다수의 작가들을 발견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100%를 기본 단위로 잡듯이, 대강 100세 이내로 잡으면 된다.

실제로는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여러 변수로 인하여 그보다 좀 적은 80~90년 즈음에 생을 마감해도 상당히 럭키한 편이다.

다행히 인간은 망각을 아주 잘하며 머리가 좋지 않다.

그래서 매년 초 자신들이 죽음에 1년 더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년 축하 파티를 한다.

아무리 기술발달이 극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하는 약물을 전혀 개발해내지 못한다.

그래도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남은 인생이 짧든 길든 간에

그 시간동안 괴롭지 않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의거해 우리가 에너지라 가정하면,

어떤 고형화되어 묶인 육신 안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에너지를 거의 발휘하지 못한 채
 
응축되어 있는 세월을 경험을 하는 것 또한 색다른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권태와 괴로움에 싸인 시간 속 삶의 괴로움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1. 인간들은 이 단계에서 종교를 탄생시켰다.

2. 그리고 자연 속 물질에서 그것들은 혼합하거나 변형하여 마약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3. 혹은 이 고민 자체를 멀리 치워두고 잘 쳐다보지 않으며 덤덤하게 살아낸다.



세 가지 모두 괜찮은 선택이다. 
 
 
1. 종교
 
삶에 대한 직시보다는 두려움 투성이인 자기 생의 의지권을 다른 데 넘김으로서 얻는 일종의 안도감이다.
 
명확히 증명될 수 없는 상상 속 신화와 같은 것을 진정으로 믿게 됨으로써, 사람에 따라 잠시 희망이 피어나기도 한다.
 
종교 속에서 얻게 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감이다.
 
나는 따지자면 어릴 적부터 1번(종교-기독교)을 선택한 꼴인데, 그것이 자의 반 타의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령대가 어렸을때부터 지속된 세뇌의 영향인지, 굉장한 깊이로 빠져들었었다.



요즘 미디어에서 정명석을 많이들 때리던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무슨 사이비 이단 종교든 간에, 거기에 빠져있는 신도는 일반 사람들보다 수십 배는 행복하다. 

그것이 가짜의 행복이었음을 알고 그동한 탈취당한 자신의 시간, 물질, 몸 등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들은 어쩌면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몸담는 사람들은 그들이 착취당하는 것이 행복하다. 

그것을 착취나 피해로 인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곳을 빠져나갔을 때 기다리는 것들이 온갖 불행과 괴로움이라는 매커니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 안의 신도들에게 그 가나안을 당장 떠나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쌓아왔던 삶을 포기하라는 말과 진배없다. 

만약 당신에게 무한한 안정과 재물, 매력적인 이성과 행복한 관계를 쌓아오던 삶을 중단하고

네 발로 거리로 나아가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면 응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러한 행복 속에 있었다. 

나는 신과 교통한다고 느꼈으며, 애매한 것들을 파악했고, 고차원적인 것들이 깨달아졌다.

누군가 믿든, 믿지 않든 중요치 않다. 각자의 경험은 각자의 지능 또는 수준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가슴속에는 언제나 부풀던 설레임과 행복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 중 아주 적은 양의 거품이 씻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의 자신을 쳐다 보았다. 

나는 직시할 수 있었다.
 
내 삶은 구속되어 있으며,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마음대로 표현해 내거나 실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왕국 안에서 통제받으며 분위기에 휩쓸려 웃음을 짓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종교에는 따라야 할 규칙이 있고 교리가 있으며 하다못해 분위기에 의해 조장되는 묵언의 의무라도 있다.
 
그것은 집단 혹은 단체가 가질 수 있는 불가피한 특성인 것이다.

양 옆을 쳐다보니 나와 비슷한 또래들, 나이 지긋한 사람들까지 역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행복감'을 포기하고 진정한 '행복'을 원했다.

그 행복은 진정한 나로써 솟아나오는 것을 살아내는 '자유'에서 오는 것이었다.

 
2. 마약
 
남은 생의 시간을 삭제시키고 죽음으로 급히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물질은 우리 뇌를 조종하여 극도의 쾌감 속으로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다만 마약을 투약하는 것은 타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뇌의 특성 상 더욱 많은 양을 원하는 중독성이 본인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해 권장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생을 서둘러 끝내고 싶거나 남은 생을 극단적인 쾌감이 주는 행복 속에 마무리 하고 싶다면

그들의 결정에 돌을 던지기 또한 어렵다.

하지만 이미 시작하는 순간 멈출 수 없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내게는 커다란 걸림돌로 다가온다.
 
남은 생의 시간이 꽤 남았다고 생각하거나 앞으로 제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손대지 않는게 좋을 듯 하다.

 
3. 회피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먼 미래의 일로 여기며 그저 오늘의 삶에 집중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형태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느낀다.
 
실제로 죽음은 개개인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준 사실이 없다.
 
따라서 죽음에 도착해가는 여생이 생각보다 좀 길 수도, 훨씬 짧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다른 것에 크게 기대지 않으며(실제로는 모두가 여러 것에 기대고 있지만),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지켜 볼 때면 나는 경이롭다는 느낌 또한 받게 된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똑같은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는 직장인 등을 보면서 말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묵묵한 인정의 자세이자,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 아니겠는가?
 
허나 그 남은 생을 살아갈 때에 좀 더 삶을 자유롭게 살아내고 싶다면 
 
시간을 축내며 도리어 자유를 쫓기고 있는 나날들을 가만히 놔두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내게도 자유를 얻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직장을 나오고 난 후 몇 달간은, 나는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 앤디처럼 장대비를 얻어맞으며 자유를 느꼈지만

이 자유가 지속되기엔 '돈'이 필요했다.

돈을 벌려면, 하루 중 적지 않은 시간동안 다시 자유를 속박당해야 했다.

더 많은 양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기간 동안 자유를 빼앗겨야 했다. 

나는 이 이상스런 매커니즘에 다시한 번 환멸을 느꼈다.
 
이런 굴레를 알아버린 가운데,  다시 대기업에 들어가 남의 돈을 불려주며 찌꺼기같은 월급만 받는 생은 선택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 즉시 사업자등록을 했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길에 서 있다.
 
 
그 중에 만나 내 인생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 이론이 있다. 
 
이론이라 부를 수도, 물론 거창하게 법칙이라고 불러지기도 한다만, 철학일수도, 가치관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원리는 세상에서 마법이나 사기 따위로 여겨지며 꽤나 멸시받는 듯하다. 그 속성에 비해서 말이다.
 
나는 이 이론을 믿고 실천하고 있으나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기준에 매일 시간을 떼어놓고 하고 싶은 몇 가지의 행위들이 있는데, 나는 아직 그것을 꾸준하게 수행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 수개월 간 그 이론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를테면, 나는 죽음에 관한 상념에서 많이 벗어났고, 
 
알면서도 자행했던 부정적인 사념이나 한탄의 고리에서 스스로 벗어나와 우울감을 잘 느끼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나는 어색하지만 감사와 충만한 기쁨으로 그 시간들을 채워 나가게 되었다.
 
그 이론이 내게 정신적인 영향만 미쳤다 해도 그것으로 내게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들 또한 내게 펼쳐졌다.
 
예컨대 나는 오늘 기준으로,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의 차를 사 드렸다.
 
나는 사업자가 된지 1년이 채 되기 전에 600% 이상의 수익 성장을 했다. 
 
돈 걱정이나 스트레스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이 시작되었다. 
 
이는 내가 퇴사했던 대기업을 다닐 때의 연봉 기준 2배가 넘는 액수다.
 
하지만 나는 아직 목표로 가는 과정에 있고 성장할 일은 수도 없이 남아 있다.
 
이외의 외모, 성격적인 부분의 긍정적인 변화나 기타 다른 목표들을 성취해 나간다는 등의 성과 또한 있었다.
 
 
나는 최대한 내게 있었던 사실을 객관화시켜 묘사하는 중이다.
 
이 이론을 의거하여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내 삶에 적용시켰을 때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나는 이 이론을 처음 들었던 것이 아니며, 솔직하게 말하면 중,고등학생 시절에 발견했다. 
 
전국 각지 서점에서 너무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지금은 그 때보다 미디어 매체가 급속하게 발달하여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때로 나는 이 이론을 짧은 기간 적용하여 믿어보다가 이내 사기라는 결론을 내린 적도 수 차례 있었다.
 
허나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 적용했는지가 정확히 짚어진다.
 
다시 내가 이 이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혹 이들의 주장이 '사기'라 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명제 또는 가치관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내게 그저 긍정적인 영향을 조금이나마 미치면서 나의 자산이나 에너지를 그렇게 많이 갉아먹지는 않는 이론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사실이 아닌 것에 속으며 살아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나는 이미 갚지 않아도 될 많은 것들을 얻고 있다.
 
 
정리하자면, 내가 (또는 우리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잔여 기간만큼의 권태와 우울감, 혹은 괴로움을 얼마나, 어떻게 줄여나가는가가 관건일텐데,
 
나는 수많은 생각을 거친 뒤, 생이 아무리 초라하고 허무할지라도 
 
내가 아무런 요구와 소원을 빌지 않았음에도 공짜로 나에게 주어진 삶이 와 있다면, 
 
쉽게 말해 내 코에 콧바람이 아직 들어오고 있다면, 
 
나는 남은 기간을 긍정적인 에너지와 생기 있는 감사와 찬탄 등의 기를 소유하고 주변에 드리우며 사는 것이 
 
사실상 가장 옳은 판단이 아닐까 결론짓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내가 마주하는 현실은 기적과도 같다.
 
나의 스케치북은 검고 두꺼운 붓으로, 나의 의도와 다르게,
 
모두가 그리고 마는 세모지붕의 집과 구름 두 덩이, 그리고 진부한 태양이 그려졌지만
 
그 그림을 기점으로 나는 새로운 숲과 바람, 나부끼는 연들을 그리며 형형색색으로 채색하고 있음을 느낀다.
 
 
앞으로 나의 일기장엔 해당 이론과 관련한 글이 꽤나 많이 기재될 것이다.
 
내가 늘 칭하곤 했던 나의 이곳, 일기장은 쓰레기통이었다.
 
커다란 괴로움이 있을 때 들어와 나의 오물과도 같은 덩어리들을 쏟아놓고 가면 그만이던 곳이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이 곳을 쓰레기장이라 칭하지 않겠다.
 
진부하지만, 이 곳은 서두에 말했던 나의 생을 그려나가는 스케치북이 아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