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현 시대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는 이유에 대해 내게 시원스런 답을 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스승으로 따르겠다. 아니, 그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고 나의 전 재산이라도 드리겠다.

 

 아기를 낳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궁색하기도 한 이 질문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성장과정에서 비롯한 각자의 이유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자기의 이유에 대해 말할 것이다.

 

 실제로 모 커뮤니티에서 이와 같은 주제로 떠들썩한 이슈가 있던 적이 근래에 있었나보다. 수많은 댓글들이 거의 5:5로 찬반이 갈리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 "자식은 왜 낳는 걸까요?"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num=1197752

 

 출산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으나, 그 논리가 심히 빈약하기 그지 없다.

 

1. 인간의 본능이다. - 나에게 출산과 양육이 단순한 인류의 본능이며, 혹은 내제되어 태어나는 성욕이 낳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답을 해주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개중에 가장 나은 답을 한 것이라 칭찬할 것 같다. 뭇 짐승들을 보아도 욕구에 이끌려 짝짓기를 하고, 때가 되어 새끼를 낳은 뒤 본능적으로 생기는 모성애에 이끌려 일정 기간 그들을 양육한다. 생각하거나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빼고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에게 본능 이상의 것이 있다고 설명하기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 

 

2. 대를 잇기 위함이다. - 현 시대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생각마저 굳어져버린 여느 노파가 한 말일지도 모르기에 무시하려 했으나, 당장 수십 년 이전에 이 나라에서 남존여비 사상 하에 자행되던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한다.

 

3. 부부만으로는 심심해서. 또는 가족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이 좋아서...(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등등 - 이 또한 들을 가치도 없는 이유이지만, 의외로 일반 사람들의 대화 가운데에서 심심챦게 캐치되는 어구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대가족이 좋다는 둥, 집안이 시끌벅적한게 좋다는 둥,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둥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지는 여러 말들 속에서 이기주의와 생명경시의 사상이 엿보이는 건 내가 예민한 탓인가. 특히,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행복감을 위해 마치 자판기나 메뉴판에서 음료를 추가하듯 아기를 낳기로 결정하는 수많은 부부들을 보면-물론 향후 수십년 간 그들 자신이 업보를 치루며 깨우치겠지만-당황스럽기 그지없다. 

 

4. "너도 그렇게 길러졌다." - 너도 그렇게 부모의 수발과 고생 속에 키워졌으면서 아기를 낳고 힘들다 말하지 말라, 아기를 낳는 것은 너희 부모님이 그랬듯 당연한 것이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선택권'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 당장 나 자신 또한 이 세상에 나의 선택 없이 태어난 사실에 대해 굉장한 당혹감과 피곤함을 감출 수 없다. 나는 남은 여생을 죄수가 해야하는 노역을 하기 위해 산다고 믿으니 그나마 좀 편해졌다. 어쩌면 출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이러한 비관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맞다. 그럼에도, 다른 아기들은, 아니 새생명들은 무슨 죄인가? 그 아가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함께 과연 태어날 것인지 말지 물어보고 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쳐도, 성년이 되기까지 세상에 대해 대강의 데이터를 쌓아온 부모들이 더욱 골똘히, 심각하게 대신 고민해주어야 할 주제가 아니겠는가?

 

5. "아기를 낳아보면 왜 낳는지를 안다." - 주변 양육자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보면, 마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아이를 낳고 한계에 부딪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다보니 정말 부모가 되더라, 동시에 나의 부모 또한 이해하게 되고, 안 낳았으면 후회할 뻔 했다 등의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아름다운 스토리이며(물론 그 쪽 자식들에게도 물어봐야 하겠지만), 부모가 낳은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되고 이른바 '성숙'해져 가며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듯한 이야기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공감 또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왜 아기를 낳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낳아 보면 안다.' 라든지, '낳으면 성숙해지고 부모가 되며, 후회하지 않는다.' 등의 대답은 근거가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답변 자체에 대한 심각한 논리적 결함도 존재한다. 알다시피 "왜 OO를 했습니까?" 라는 질문에 "OOOO기 때문입니다."가 아닌  "너도 해보면 알아." 라는 식의 답변은 논점을 상실한, 답변이라고도 하기 민망한 답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본인의 느낌 또한 개인차가 심하며 본인과 똑같이 느끼지 않는 사람 또한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6. 인생에서 꼭 해보아야 할 경험 + 주변 모두가 다 하니까... - 이 역시 현 세대, 아니 어쩌면 전 세대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져 온 무의식적 이유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현대사회에서, 개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좁은 땅덩어리 대비 인구가 과잉 포진됨에 따라 비교의식의 뿌리가 이미 돌이킬 수도 없을 만큼 깊고 굳게 얽어매었다. 한국사람들은 저마다 남들이 하는 것(그 조차 본인의 더듬이 반경에 겨우 포착되는 굉장히 제한적인 풀장 내에서)을 그 이상 하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 것 역시 어쩌면 부모세대와 사회가 주구장창 주입해 온 결과 당연한 의무이자 깨야 할 퀘스트 쯤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결혼도, 출산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이 또한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결혼과 출산에는 반드시 타인(제3자)이 껴 있다. 나의 경험 버킷리스트를 위하여 다른 생명을 이용할 자격이 과연 있는 것인가? 물론, 결혼 같은 경우 그들과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의식수준에서 경험퀘스트를 깨야만 하는 강박에 결혼을 동의했다면 문제 될 일은 없다. 하지만 출산은 다른 얘기다.

 

7. 내가 발전하기 위해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 - 이 또한 3번과 맞닿아 있는 비슷한 이기적인 이유이다. 

 

8. 국가적 의무를 위해서. - 국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마치 세뇌시키듯 굉장한 위험으로 연일 보도하고 있으며, 이같은 현상이 지속될수록 향후 국방이 무너지고 국가를 잃을 위기에 처할 것인 냥 겁을 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 1명은 곧 노동력 1의 상승을 의미하며, 인구가 많을 수록 경제, 국방, 사회의무 즉 세금 등 다양한 방면에서 나라의 이득이 되는 것은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국가를 위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주장이 이슬람교의 번창을 위해 출산률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는 이교도들의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9. 재산 상속, 노후 대비 등... - 이 외의 같잖은 이유들은 설명할 가치도 없어 자르겠다.

....

 

 출산의 이유는 비단 한 가지로만 정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들, 또 상기되어있지 않은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켜 인간들은 아기를 낫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까운 나의 친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너는 왜 아기를 낳았니?"

 친구의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나랑 반반씩 닮은 아기를 꼭 낳고 싶었어." 

 이 또한 아기의 선택은 없는, 이 생에 아기를 태어나게 한다면 무조건 아기가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뱉어진 이기적인 대답이었지만, 솔직하게도 인간의 본능이었다는 저 1번의 이유에 해당하는 답이었다. 그는 아내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다.

 

 오늘도 수많은 부부들 또는 연인들이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며 출산할 준비를 한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도, 우리 인류는 우매하기 짝이 없어 '성욕'으로부터의 연장선 상에 맞닿아 있는 아기를 향한 욕구, 즉 본능의 충족 그 일환에서 거기에 이러쿵 저러쿵 같잖은 이유를 붙여 대며 출산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기를 낳는 것은 온전히 너, 또는 부부의 선택이다, 네가 싫으면 낳지 않아도 된다." 라는 말도 틀렸다고 생각한다. 수 차례 걸쳐 말하듯 그 가운데 아기의 선택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아기의 온전한 동의와 선택이 들어있지 않는 한, 그 아기가 태어나 겪고 마주하게 될 크고 작은 행복과 불행들, 좋은 일과 불의의 사고들, 그 끝에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참으로 잘했다 말하는 대답을 듣기 전 까지는, 부모의 성행위에 따른 출산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인간은 출산을 통해 번식해 왔으며, 수정과 착상, 세포분열에 따른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은 신비롭고 경이로우며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우리는 학습되어 왔다. 진정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야말로 세상에 던져진 아이의 입장에서는, 기왕에 눈 떠보니 이 나라와 이 가족, 이 세상에 즐비한 여러 불공평과 압박 속에 좋게좋게 생각하며 삶을 유지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태어난 것이 좋습니까? 안 태어난 것이 좋았습니까?"

 팔순이 넘은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과연 비율이 얼마 대 얼마로 나올까. 간간히 언론에 스위스의 조력자살(안락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국에 도입시키길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보인다. 아니, 저 질문을 사고로 죽기 직전이거나, 이른 나이에 중병에 걸려 일찍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들이댄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것을 선택할까? 우리는 살 때에도 저와 같은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잘 버텨 노년까지 살아남았다 해도 100년 근처도 넘기지 못하고 아파 죽을 것이 예견되어 있다. 적어도 OECD국가 중 아직도 자살률 1,2위를 답하는 한국에서는 과연 어떤 대답이 더 많이 선택 될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웃지 않고 울음을 터트린다.

 왜 그렇게 진화되었을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울음소리보다 웃음소리를 더 좋아한다.

 신생아는 그 후 100일 까지도 모든 의사소통을 얼굴이 잔뜩 찡그러진 울음으로 한다. 그 울음은 그냥 울음이 아니며 아주 고통스러운 굉음을 내는 것에 가깝다. 모든 아기는 아마도 본인과 우리네 생이 곧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아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은 99%의 고통과 권태, 그것을 이겨내는 인내와 시간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시간이 아주 찰나에 잠깐 가실 때, 우리는 1%의 행복을 느낀다는 이 사실을 말이다.

 

 작고 귀엽다고 느껴지는 아가는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사람들은 말 할지 모른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왜 좋아하지 않냐고. 그들은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아기는 곧 세월이 가며 성년의 나이를 향해 성장할수록, 세상의 경쟁, 압박, 비교, 그것이 만들어낸 무형의 가치들 가운데 혼란을 겪으며, 어쩌면 슬프게도 단단해져 가며 자라갈 것이다. 부모가 일궈 놓은 특권을 물려받지 않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며 개천에서 용 나듯 신분상승을 하거나, 일반적인 무리에서 아예 탈출하여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는 아주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현실을 모른척 하거나 긍정적으로 수긍하는 제스쳐를 취하며(심지어 본인도 그렇게 믿으며) 희희낙낙 살다가 적당한 곳에 안착하고, 때로는 성년이 지난 후에도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모와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거나, 혹은 이도저도 아닌 그저 한 군중 속 그림자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리고 시간만 축내며 늙어가는, 이 세 가지중 하나의 케이스가 된다.

 

 반출생주의(反出生主義, Antinatalism 또는 anti-natalism)에 대하여

※ Quartz의 「Suing your parents for being born has philosophical support」를 번역한 글입니다.

 인도 뭄바이에 사는 27살 남성 라파엘 사무엘 씨가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세상에 낳았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했다는 뉴스가 많은 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태아의 동의를 얻을 방법이 사실상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는 사무엘 씨의 주장에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린다는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가 대부분인 가운데 오늘은 반대로 사무엘 씨의 신념으로 보이는 반출생주의(反出生主義, anti-natalism)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반출생주의란 말 그대로 사람이 세상에 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부정하는 철학으로, 부모라고 해도 자식을 영문도 모르는 채 세상에 나오게 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엉뚱하고 기괴한 철학 같지만, 실제로 유명한 철학자 가운데 진지하게 이런 주장을 편 이들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케이프타운 대학교 철학과의 데이비드 베나타르(David Benatar) 교수일 겁니다. 철학과 학과장이기도 한 베나타르 교수는 지난 2006년에 <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로움>이란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2년 <뉴요커>가 반출생주의를 자세히 다룬 적이 있는데, 이 글도 베나타르 교수의 핵심 논지를 다뤘습니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전으로 물려줄 수 있는 질병을 앓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부부라면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가 고통 속에 힘겹게 살아갈 것이 뻔하므로 아이를 낳지 않는 쪽이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유하거나 유전적인 질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부나 연인이라면? 그 아이가 행복하게 자랄 가능성이 더 크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낳는 것이 도덕적 의무까지는 아닙니다. 베나타르는 이 논리를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난 결과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행복에 확장해 적용해 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났다면 겪었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건 부모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신중하지 못했던, 무책임했던 부모에게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뉴요커는 베나타르의 저서에서 다음 구절을 발췌, 인용했습니다. 즉, 내 생각에는 대체로 좋았지만 나쁜 것이 아주 조금 섞여 있는 삶, 대체로 행복했다고 해도 어느 순간에라도 불행하고 끔찍했던 삶이란 결국,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베나타르 뉴요커는 지난 2017년 베나타르 교수의 주장을 한 번 더 다뤘는데, 이번에는 삶이 왜 나쁘다고 생각하는지 반출생주의의 근거를 좀 더 다각도로 조명했습니다. 삶은 싫은 일의 연속입니다. 날씨는 너무 덥거나 너무 춥고, 늘 화장실에 가고 싶고, 뭐를 하든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거나 화나는 일투성입니다. 베나타르는 우리에게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억지로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손쉬운 해결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나쁜 것이니 태어난 이상 계속 사는 편이 낫다고 베나타르는 주장합니다. 다만 삶이라는 것이 애초에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는 거죠. 삶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삶과 죽음 가운데 선택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은데, 그러려면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베나타르가 삶의 모든 부분을 부정하고 끔찍하게 여기는 염세주의자도 아닙니다. 삶이 무조건 다 끔찍하고 나쁜 건 아니다. 반대로 죽음도 모든 측면에서 다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삶이든 죽음이든 대체로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끔찍한 일이다. 삶과 죽음 두 가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베나타르 반출생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 인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베나타르 같은 반출생주의자들은 인류의 멸종을 그리 끔찍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소름 끼칠 만큼 끔찍한 존재로,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끊임없는 고통을 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출생주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 인간이 끼칠 수 있는 도덕적 영향력을 고민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삶은 가치 있는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아이가 잠재력을 꽃피우고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번에는 무조건 사람을 많이 낳고 보자는 식의 결론에 다다를 겁니다. 이런 무책임한 번식 지상주의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삶에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면 중간 어느 즘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데, 문제는 기준이 될 만한 철학적 원칙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반출생주의적 담론에 대해 혼자 자살하면 되지 않냐는 조롱이 곧잘 등장하기도 하는데 고통과 죽음을 구태여 후손에게 강요하지 말자는 반출생주의의 취지를 망각한 논점 일탈이자 본능적 거부감 표출에 불과합니다. 반출생주의자로서의 이상적인 행동은 자살이나 학살이 아니라, 계몽과 입양입니다.

 [이미 시작된 인생을 중단하는 것과 인생을 시작하지 않게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개인에게 죽음이 생존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지만, 죽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자살은 고도로 진화한 생존 본능 때문에 매우 괴롭고 힘든 일이며, 안락사 역시 제한적이다. 또한 주변인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만큼 죽음이 실제가 어떻든 두려운 해악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필멸자를 낳아서는 안 될 이유가 된다. 심대한 고통이나 자살 충동을 겪는 사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고통받게 된 개인이 자살하면 그만이니 그럴 위험을 감수하고 낳아도 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실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부모들이 진지하게 고려하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긴 하죠. 다만 “태어나게 해달라고 빈 적도 없는데 왜 나를 세상에 낳아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라며 분노에 차 있는 청소년들 그리고 출생에 뜻이 없는 여성들은 그런 생각이 실제로 엄연한 철학으로 승화해있다는 점은 알고 반항해도 될 겁니다.

[삶은 고통스러울 수도 즐거울 수도 있는데, 먼저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아기를 낳아 고통을 겪게 하기보다 차라리 낳지 않아 고통을 없애는 것이 명백히 나은 선택이다. 반면 삶이 즐거운 것이라면 아기를 낳아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이나, 그렇다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해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기를 낳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주체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특별히 해로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이 고통스러울 경우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낳는 것보다 월등히 유리한 반면, 삶이 즐거울 경우에도 전자는 ‘행복의 부재(不在)’라는, 적어도 해롭지 않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다. 삶이 즐겁다 해도 아기를 낳아 행복한 사람을 생산할 도덕적 의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고통스러운데도 아기를 낳아 불행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링크 : 잊혀진 여성들 https://maily.so/almostfamous/posts/1511e123
 

왜 나를 낳았어요?: 반출생주의(anti-natalism) 철학에 대하여

삶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maily.so

 

 내가 꽤나 존경하는 독일의 철학자 쇼팬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본능적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고, 존재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고, 쾌락이 고통을 배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생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며,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굴복하여 아이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부도덕하다. 따라서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유일한 행운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동방예의지국에서 지독히도 세뇌되어 온 "효도"의 가치는 더 이상 빛을 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인다. "낳아 주었으니 감사하라"는 말처럼 안하무인이며 적반하장인 문구가 어디 있는가? - "낳음당했다"... 낳아주었으니 감사하라는 말 동의하시나요?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3429355 

 

 즉, 아이를 낳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히 또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며, 각자의 결론에 도달했더라도 그 도의적, 논리적 근거가 유독히도 심히 부족한 이기적인 답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1번의 이유에서 "그나마"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동물적인 본능 또는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사고'를 벌였을 뿐이며 평생에 걸쳐 이 사고를 수습해야 할 사회적, 도의적, 인간적 의무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위 자랑스럽게 '자식농사'라는 부끄러운 표현을 쓰면서도, 자식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 돈에 비해 자식에게 돌아오는 것은 터무니없는 수준인 사실이 어쩌면 수학적으로도 당연한 계산이며 이 사고로 인하여 인생에서 얻을 어떤 향유와 여유, 그로 인한 자기성장과 행복이 크게 감소하는 결과를 낳더라도 그에 불만 따위를 갖지 않는 것이 성숙한 인간의 대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국가와 사회, 그리고 그에 동조당한 대다수 사람들은 아이를 출산하고 엄마, 아빠가 되는 과정이 대단히 아름답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라 응원해주고 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느낄 아득한 회환과, 어쩌면 그와 같은 생각을 시도할 시간과 체력 조차 소모당하게 될 앞날들은 자기 스스로가 겪으며 알아차리게 되어 있다. 

 

 전체적인 인류의 관점에서 통으로 생각하여보면, 출산이 인류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행위인 것은 맞아 보인다. 그러나, 더 커다랗게 존재하는 자연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또 다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다시금 묻는다. 

 "아기를 왜 낳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