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우울을 없애는 방법은, 주변 환경이 바뀌어지길 고대하는 것보다 현재 나를 둘러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말이었다. - 이 문장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왠지 모를 특별함을 느꼈다. 나는 보통의 경우 메모장을 꺼내 적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럴 수도 없을 만큼 손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척박함'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이 새벽까지 저 놀라운 단상은 내게 고스란히 잘 남아 있다. 

 

 나에게 울림을 주는 단어였다. '척박함'......

 

 나는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들과 비교해 나의 삶의 지수를 객관적으로 평가내린다면 나는 그닥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있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깊게 뿌리내린 억울함과 회한, 알지 못하는 땅 속으로의 끌어내림이 언제나 존재한다. 나의 심장은 꽤나 지탱하기 어려운 무게추를 달고 살아 한 시도 끌어올려지지 못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그 시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짙은 우울감이 해가 거듭할수록 심연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는 강도가 세진다는 것이다. 나는 일전에 이를 마치 친구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힘의 강도로 표현했었다. 어떤 날은, 진정 그 친구가 가자는대로 함께 손을 잡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청연(晴煙) 속으로, 내 앞에 놓인 먹구름을 온 얼굴로 맞아가며 그 곳으로 함께 가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따라가면 절대 되돌아올 수 없는 선택지인 것을 알기에, 그 사실이 맘에 걸려 두 다리로 버틴다. 지금 출발한다면, 지금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도 시간이 흘러 아른거리기 시작할 때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또한, 몇 명의 인생들은 그렇게 결정한 나로 인하여 심감한 트라우마와 돌덩이를 얹으며 남은 날들을 살아갈 것이기에, 난 마치 큰 죄를 짓는것만 같아 망설여진다.

 나는 손목을 잡은 그 친구의 힘이 아직 절반도 쓰여지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약 10년 전에도 동일한 느낌을 받아 글을 남겼으며, 그 때의 세기는 현재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이다.

 

 끌려가지 않고 버티기로 했다면, 나는 이 지루하고 덧없는 날들에 어떤 의미부여를 하며 살아가야 할까. 불행한 인간, 나는 웬만한 의미부여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함도, 누군가를 향한 희생도, 그 어떤 고상한 가치관과 그에 따르는 몸짓도 수족관의 물고기들의 의미없는 헤엄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다만 솔직해지자면, 나에게서 솟아나오는 그 무엇 - 형언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 그것 대로 살아갈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었던 과거의 추억만이 짙게 남아있는 것이다.

 

 

끝 -

끝 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넘어 물결같이 춤 추던 님

무명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 볼래

지녀 볼래

 

물결 건너편에 - 

황혼에 젖은 산끝 보다도 아름다운

아 -

나의 님 바람

뭇 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무목여행 하는 그대여 - 

인생은 나

인생은 나

인생은 나

인생은 나

...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김광석이 부른 '바람과 나'라는 곡을 나도 부르면서, 그 안에 알알이 박혀있는 가사들이 나의 솟아오르는 그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 위에 무감하게 불어가며 무목여행 하는 바람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이다.

 

 나는 뭇 바람과 같이 진행 하고 싶었다. 아무 의무도, 책임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더 이상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는 일과 옆 사람의 몸에 닿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웅크리는 행동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법도, 예절도, 세금도, 육아도, 결혼도, 경쟁도, 후회도, 비교도, 질투도, 계산도 없는 장소에 가서 비로소 학습받은 나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설령 그 유토피아와 같은 장소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짙은 색감으로 채색된 나의 우울감이 온전히 사라질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된 것이다. 나는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는 인간이며, 나에게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열망도, 삶에 주어진 족쇄들을 차고 수행해 나가야 할 것들을 올바르게 완료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신기루를 위해 어쩌면 -나중에 깨닫길- 중요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피곤한 이 삶의 끝이 내가 늘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 꼭 나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변수들로 인하여 조기졸업 할 수 있음을 상기해 본다. 따라서, 서둘러 먼저 자퇴를 하는 것은 굳이 필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해마다 돌아오는 학기 중에 내가 어떠한 신기한 것들을 배우며 경험할 수 있는가이다. 

 

 요는,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이 척박하고도 황무지같은 땅에서 꽃 하나를 피워내기 위하여 끓어오르는 힘으로 다시 밀쳐 오르는 것만이 행복을 위한 시작의 단계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경험에 따르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타오르는 아스팔트 바닥에서도 그 여들여들한 민들레 새순이 기어코 움트고 비집고 나오는 것과 같이 아주 고집스러운 힘이 필요하다. 불행한 사람이 작은 행복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사활을 걸어야 한다. 때마다, 시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의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시작은 언제나 그랬듯 오늘의 커피 맛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근시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내 눈 바로 앞에 것들만 집중하며 가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나의 주변 환경은 그대로임이 분명하다. 속을 썩이는 가족도, 매일 똑같이 밀려오는 불안한 마음도, 탐탁치 않은 고지서도, 보기만 하여도 스트레스인 과제들도 모두 주변에 흩뿌려져 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아주 작은 유희(遊戲)가 반드시 있다. 

 

 없을 수는 없다. 그 아주 작은 재밌거리,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필사적으로 찾아 보자. 그 하나에 감사를 해 보자. 당연한 듯 생각 말고 만족해 보자. 척박했어도, 오늘 이거 하나면 됐다고 해 보자. 

 

 내게 행복은, 생각보다 처절해야 얻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