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으로 보는 행복의 실체
행복이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며,
충분한 불행을 겪지 않고서는 충분한 행복 역시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을 간단한 변증법적 3단 논법을 통해 실증하고자 한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불행하다.
잠을 못자면 불행하다.
몸이 아프면 불행하다.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
외로우면 불행하다.
명예가 없으면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면) 불행하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은,
배가 부르면 배부른 행복을 모른다.
충분히 잠을 자면 잠자는 행복을 모른다.
건강하면 아프지 않는 행복을 모른다.
항상 돈이 넉넉하면 돈 쓰는 행복을 모른다.
주변에 대화할 사람이 많으면 외롭지 않은 행복을 모른다.
처음부터 주목을 받으면 남다른 위치에 선 행복을 모른다
(그것을 그저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끼니를 굶고 밥을 먹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수면부족으로 괴로울 때 잠을 자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병마를 극복하고 건강해지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할 때 돈을 벌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절대고독 속에서 몸부림치고 난 다음에 사람을 얻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철저한 무명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 명예가 드높아지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핍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요,
오히려 행복의 필수조건이요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결핍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결핍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음과 양이 서로 충분히 술래잡기를 한 다음에야 인간은 그 균형점에 서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십팔사략>에서 말한 바,
오래 움크린만큼 높이 뛴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생명체 중 유일하게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전두엽 덕분이다) 인간은
지금 자신이 겪고있는 결핍을 불행의 증거로 볼 게 아니라
더 장대한 희열을 느끼기 위한 음악의 전주곡(prelude) 정도로 바라볼 순 없을까.
영화든 드라마든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복잡한 갈등 구조 속에서 주인공을 충분히 불행하게 굴린 다음에 막판에 극적으로 성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희곡작법은 우주창조의 희곡작법과도 동일하지 않을까.
기독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욥에게 오히려 시련을 준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기승전결'로 제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절망에 쉽사리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뒤따른다.
중간에 주인공이 자살하면 게임 오버잖아~!
괴로워도 살아 있어야 빛도 보고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