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
유일하게 손에 넣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이는 일관되게 나를 향한 문을 굳게 닫고 있었고 나는 십여년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모습이 괴물로 변했다가, 천사로 변했다가, 마녀로 변했다가, 공주로 변했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을 통해 세상에서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간단한 한 가지 사실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며 손에 넣어보지 못한 것이 더 많지만 끝에는 넣을 수 있을거라 아직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언젠가 내가 찾아가면 손에 넣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10년을 버텼다. 뻐팅기고 또 매달리며 때로는 우악스럽게 고집을 부리며 그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움켜쥐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멈추고 싶어도 멈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훨씬 맞을 것이다. 그간 나는 적지 않은 이성교제를 통해 '여자'라는 각 개체가 가진 독립적이면서도 공통적인 관념을 실제적으로 얻게 되었다. 이제 모든 여자들은 내게서 공통된 특징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상을 가진다. 지난 날 이것들이 상상에서 나온 허상이었다면 점점 그것은 구체적인 정보들의 집합을 기반으로 한 실체적 모양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유용한 정보들로 파악할 수 없는, 아니 파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다면 그녀이다. 나는 명백한 사실에 귀를 닫고 마지막 남은 하나의 환상을 믿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싫어하는 여자의 대체적 성격 한 부분이나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을 때에도 스스로 모르는 척 넘어가며 만남을 지속하고 싶어 할 것 같은 여자는 이 사람 한 명 뿐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 년간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외부적인 그녀의 상을 어느 정도 확립한 상태이다. 그러나 내가 바깥에서 파악한 그녀는 그녀 본래의 수준에 십 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제한된 정보로 그녀를 파악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내가 어린 날에 그 작은 얼굴을 보며 느꼈던 충격이 옳았음을 믿고 싶다.
이 또한 호르몬들의 화학적 장난임에 틀림 없다. 나는 그녀와 사귀어 보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해 잘 모르며, 오로지 얼굴과 목소리를 마주한 후 느꼈던 십 년 전 설렘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장난에 걸려들게 되더라도 내가 지나쳐왔던 수많던 관계들처럼 절망을 남겨두고 종결될 것 같지는 않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크기와 정도는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나는 이제껏 그것의 절반도 못 미치는 느낌으로 관계들을 출발해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 마음의 안위와 진정을 위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해결책들을 늘어놓고 글을 맺어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던 몇 개의 SNS 창구들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의 요구로 폐쇄해 버렸다. 나는 그 행위가 때론 후회되기도, 때로는 후회되지 않기도 한다. 이제 그녀와 자연스레 연락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으며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오래된 애인과 결혼을 준비중이다. 나의 바램과 소원대로라면, 그녀는 속 썩이지 않는 남편과 아이를 낳고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즐기다가 건강하게 세상을 뜨는 것 뿐이다.
그러나, 뭐든지 늦깍이인 내가 늦은 어느 날 어느 형태로 그녀를 찾아가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절대 강제적이거나 비인도적이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며, 상황과 당위에 맞는 시점에 다른 모습으로 방문하게 될 것이다. 나의 제한된 소원과 코웃음 섞인 소망에 의하면, 나는 세상에 알려진 어느 노래 가사나 책 한 권으로 그녀를 방문하고 싶다. 혹은 너무도 달라진 세계 속 어느 공집합의 영역에서 우연스레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현재의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든 이겨내고 자립에 성공한다면, 언젠가 나의 작(作)들을 만들어 나갈 때 그이가 반드시 들어있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내 서랍장 어느 한 구석에 있더라도 그 주어는 대부분 그일 것이다.
많은 것들은 시간을 좀먹으며 빛이 바래져 가는데, 사실상 그녀가 내게 남긴 한 순간의 기억만큼은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이 그 어떤 형태로 변하든지 나는 그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괴물이든, 결함 덩어리이든, 거지이든지 나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느낌을 존중하며 중시한다. 이것이 비합리적이거나 편향적이거나 터무니없어도 나는 이제껏 그렇게 살아 왔다. 만약 이 느낌을 초월하는 사건이 내게 찾아온다면 그것이 진실일지 잠깐의 반짝임일지는 또 다시 몇 년의 세월에 걸쳐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나는 남은 날들을 홀로 지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