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한 우리의 마땅한 자세
물론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후부터 이 남자와 결혼하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혼이 반드시 행복하게만 결론나지 않는다는 것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고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처럼 무한경쟁 사회에서 두렵기도 하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고서 평생 산다는 건 너무 외롭지 않을까. 평소 같으면 농담 삼아 그래 내일 하자! 라고 문자에 답을 해줬겠지만 오늘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닐까?
세상 거의 모든 이들이 결혼을 하려고 하거나, 했거나, 한 적이 있다. 해서 다들 한 마디씩 한다. 결혼은 현실이라느니, 아니 결국 사랑이라느니부터 시작해서 온갖 견해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 대부분은 지금 바로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그저 자신이 듣고 보고 한 것만을 기준으로 그것이 마치 언제나 당연하고 마땅한 것인 양 전제한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기반으로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하는 사회적 계약으로서 결혼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짧다.
물론 원시적 형태의 결혼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장구하다. 그러나 생물학적 결합으로서의 결혼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당연시 하는 사회적 결혼의 개념은 탄생한 지가 얼마 되지도 않은 혁신적인 관념이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결혼을 한 커플들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건 결혼하는 데 있어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혼으로 인해서 얻을 수도 있는 결과일 뿐이었다.
결혼은 겨우 20대에 불과한 젊은 남녀의 섣부른 감정에만 그 선택을 맡겨두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한 집안이 자신들의 지위나 재산을 확보하고 상속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거래였다. 특히 귀족이나 왕가의 경우 결혼은 그 자체로 정치,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동맹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저 한 사람의 감정만을 놓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바보 같은 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한 사람의 감정 때문에 가문 전체가, 아니 나라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커서 연애감정이 생기고 누군가와 눈이 맞기 전에 하루 빨리 결혼을 시켜버리려고 하는 풍속이 생겨난다. 자식의 멋대로 사랑이야말로 가문의 안정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은 귀족이나 왕가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다. 서민들 역시 결혼의 조건을 거래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거래는 물론 아버지가 주도했으며 거래의 내역은 부동산이 될 수도 있고 가축이나 보석이 될 수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관점에서 결혼의 본질은 거래가 확실했다. 그것이 거래인 이상 거래를 거간하는 꾼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게 바로 중매쟁이들이다.
그렇게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진행된 아버지의 계약에 동의할 수 없었던 딸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데서 유래한 결혼의 풍속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오늘날 멋지게 차려입고 신사인 양 신랑 옆에 서있는 남자 들러리는 옆 동네에서 아가씨를 억지로 데려올 때 팔다리를 붙잡고 도와줬던 마을 일꾼들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여자를 안아 들고 문지방을 넘는, 지극히 낭만적으로 보이는 관습은 실은 자기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여자를 강제로 안고 나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처럼 사랑이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가 탄생하고 계몽주의가 등장하는 18세기부터다.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결혼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개인과 개인이 사랑으로 평생을 함께 하는 약속을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승인받는다는 개념은 18세기까지만 해도 매우 급진적인 것에 불과했다. 만약 중세로 돌아가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했다면 모든 이들이 비웃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선 오히려 불륜이 고귀한 사랑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회적으로 승인된 결혼은 온갖 조건이 덕지덕지 고려된 가문끼리의 거래였지만 불륜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었으니까.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못 본 채 결혼한 부부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랬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 여기는 결혼의 개념 역시 앞으로는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소리다. 또한 결혼에 관한 한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결혼은 숙명적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발명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그렇다. 결혼은 제도다. 마치 부가가치세제가 제도인 것처럼. 그런데 무수한 이들이 결혼의 본질에 대해 착각한다. 결혼을 인생의 숙명적 과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과제가 요구하는 배역만 열심히 수행하기만 하면, 그럼 그 결과로서 행복은 당연히 따라 오는 건 줄 안다. 괜찮은 남자와 적당한 조건으로 결혼을 하기만 하면 그럼 내 삶의 행복은 오게 되어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거다. 그래서 결혼을 인생의 완성으로 여기고 젊은 시절 대부분을 결혼을 최대의 과제로 여기고 산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했는데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들, 세상에는 넘쳐난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남편이 극악무도한 흉악범도 아니고 아이들이 모난 것도 아니고 시댁이 비열한 것도 아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해주고 아이들은 건강하고 시댁은 합리적이다. 그럼 의심의 여지없이 자동으로 행복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있다. 아니 많다. 그럴 경우 많은 이들이 그게 그저 남편과 자신이 잘 맞지 않아서 그런 줄 안다. 혹은 바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만족할 줄 몰라서 그런 줄로만 안다. 아니다. 그런 건 두 번째, 세 번째다.
그럼 뭐가 문제냐.
그렇게 결혼 하는 건, 삶이 아니라 역할을 사는 거다. 결혼이란 사회적 역할극 속에서 딸과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라는 등장인물을 수행하는 거다. 그러나 결혼이란 제도와 그 제도에 따르는 조건들과 그 조건들이 요구하는 배역의 수행은 거래를 완성시키는 조건이지 나의 행복을 보장하는 조건이 아니다. 바로 그 점을 모르는 것이다. 거래의 완성과 행복의 도달은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결혼을 한다 만다 하는 것보다 훨씬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나는 언제 행복하고 언제 불행한 사람인가,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언제 행복하고 불행한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그리고 나서 나한테 적합한 방식의 삶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거다.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 결혼은 이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제도인 것이다. 생각의 순서가 그게 맞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대체 결혼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하여 당신 남친과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기 전에, 결혼이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기 전에, 나는 언제 행복하고 불행한지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데, 그 제도가 내게 맞는 지 안 맞는 지를 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남친한테 보낼 문자로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다.
“나부터 찾고”
김어준의 연애문자보고서 - [제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