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다른 별에서는

Sean Keating 2016. 7. 21. 01:55

선연인지 악연인지 무슨 인연인지 이 별에, 이 시대에 같이 불시착했는데 만날 수 없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만나서 눈을 쳐다보고 속 시원히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인연들이 몇 있죠. 오늘은 공상과학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써 보려고 합니다.

나는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행복한 형태로 !

지구보다 훨씬 아름다운 행성에 날 다시 내려 주세요. 그 때는 불시착이 아니겠지요. 사람마다 지은 과보대로 동네 번짓수가 달라지는데, 인간이 얼마나 한 명 한 명 다르게 삽니까. 번짓수가 아주 많겠지요? 마을은 아주 소수 공동체가 될 거예요. 서 너명... 많으면 일곱 명? 역사적으로 나와 도플갱어같이 비슷한, 동일한 크기의 선과 악을 지으며 산 사람들 몇이 날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동네 입구에서 그들은 내가 착륙하는 순간을 보며 박수를 치고, 허접하게 만든 플랜카드 몇 개 들고 날 기쁘게 맞아줄 겁니다.


그들. 눈빛을 짓는 것, 말 하는 것, 화 내는 지점. 모든 것들이 나와 똑같겠지요. 식습관 등 생활습관은 굳이 맞춰가려 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성별은 굳이 없어도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보다 훨씬 고차원적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행성을 지배하고 있을테니까. 굳이 따지자면 아가페적 사랑에 가깝겠지요. 불특정 다수를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거니까. 에로스적 사랑은 굳이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주변 환경은 이렇게 복잡하고 도시적인 것 말고, 자연 그대로의 것과 비슷한데 훨씬 더 다채로웠으면 하네요. 한 번도 본 적없는 폭포, 한 번도 본 적없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 곳에 노동이란 건 역시 없겠지요? 생각과 행동이 일치가 되는 삶. 내가 벗의 집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눈을 잠시 감으면 그 집 앞에 다다라 있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면 좋겠어요. 인생을 살면서 노동, 땀, 움직임, 숨이 차오르는 것...등은 날 힘들게 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물론 그래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걸을 수 있고 땀 흘릴 수 있다면 좋겠지요. 때로는 땅을 밟으며 걷고 싶을 테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굵은 나무 안에서 살고 싶어요. 그 나무 안에서 나도 나무를 향해 뭔가를 해 주는 활동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을 하루 한 번 펌프질로 나무 구석구석에 먹여야 한다든지. 그러면서 내가 나무와 공생하는 구조의 삶이었으면 좋겠어요. 무작정 나무를 파괴하면서 살고 싶진 않고 그러면 미안하거든요. 


평소 복장은 아름다운 색의 비단, 실크, 여러 천으로 된 갖가지 옷들로 해 주세요. 양복이나 셔츠, 넥타이는 사절입니다. 너풀거리는 천을 몸에 그냥 두르는 걸로. 너무 땅에 끌리진 않게요. 그리고 참, 동물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털이 많은 아주 온순한 동물들이 아주 자그마한 녀석부터 나만큼이나 큰 녀석들로... 그리고 그 놈들 중 가장 나와 잘 맞는 놈으로 한 마리만 제 집 앞에 데려와 주세요. 예를 들면 아주 착하고 큰 레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로.

행성과 행성은 기차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차는 며칠에 한 번 오는 걸로. 워낙 행성들이 많다보니. 그럼 나는 밤기차만 골라 탈 거예요. 친구를 만나러 다른 동네에 갈 때는 기차를 타야겠지요. 보고픈 몇 사람들 주소를 좀 써서 식탁 위에 놓아 주시겠어요? 우선 제 여자친구랑요, 그리고 그 형네 집이랑요. 우리 엄마네랑, 아빠네랑... 그리고 제 친구들 이놈, 이놈, 요놈, 저놈... 그리고 이 아이들.


그 별에서는 웃는 일이 꽤 많았으면 좋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실실나고. 누굴 만나면 반가워서 웃고.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웃고. 되도록 슬픔이나 눈물은 저 멀리 있는 것이었으면. 참, 꽤 괜찮다 싶은 파이프담배 하나만 서랍장에 넣어 주세요. 지금 피는 종이담배는 너무 빨리 끝나기도 하고 손으로 들기가 늘 불편하네요. 두꺼운 씨가도 괜찮아요. 무슨 잎사귀로 말아서 피면 맛있는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볼게요.

다른 행성에 놀러가면 참 재미있겠다... 완전히 다른 세계일 거 아냐.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취향도, 환경도 그들의 입맛대로 꾸며져 있겠지. 하루, 이틀 밤 놀다보면 꼭 가까운 해외여행 하는 것 같을거야. 낯설지만 볼거리 많은 그 곳에서 반가운 벗을 만나 회포를 풀고, 꽁꽁 묶인 매듭도 풀고, 눈물 짓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내 집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편한 그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