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간관계
친구 한 놈이 다다음주 정도에 일본 여행을 가겠다고 티켓팅을 도와달라고 한다. 다다음주에 뜬다면서 비행기 티켓도 아직 안 구했냐 했더니 "티켓은 커녕 여행 계획도 아직..."이란다. 숙소는? 여행지는? 물어보는 질문마다 쑥스러운 NO로 일관. 아니 그건 됐고 너 일본어는 좀 할 줄 아니? 물었더니 일본여행 씹어먹기 책자 한권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웃어보인다. 평소에 이리 계획 없는 놈이 아닌데 왜 그런가 봤더니 이번 여행이 난생 처음이다. 그것도 낯선 곳에 떨어질 첫 홀여행이 긴장이 좀 됐는가 보다. 출국일만 20일로 잡아놓고 티켓팅부터 시작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무작정 미뤘던 것. 아직 부모님에게 여행 간다고 말도 꺼내지 않았댄다.
"일단 오늘 밤 지나기 전에 티켓부터 같이 구해보자." 2주 전 부랴부랴 검색하는 일본행 티켓, 어디 싼게 있겠는가. 검색창 엔터를 누름과 동시에 촤르르 뜨는 대한항공 최저가 48만원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친구가 용케 아시아나 38만원짜리를 찾아 들고 온다. "아니다, 뭔가 더 싼게 있을거야. 조금만 더 파보자." 저가항공을 열심히 파보니까 몇 석 안 남은 20만원대가 걸린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이 너무 이르다고 징징대는 것 같다. "우씨...지금 비행기 시간 따질 때냐." 말은 그렇게 해도 자동으로 늘어가는 클릭질과 검색창들... 한 스무개 정도를 띄워놓고 비교해 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국일과 입국일을 약간 조정했더니 왕복 17만원짜리가 걸렸다. 피치항공의 할인운임으로 유류할증, 택스까지 포함이다. 이쯤되면 대박이다 싶었다.
이 티켓을 사기로 결정하고, 회원가입부터 어제 처음 만든 비자카드로 결제하는 동안 친구의 질문은 수도 없이 쏟아진다. "issuing country는 뭐야?" / "여권 발행국가 쓰라는 뜻이야. KOR이라 적어." / "카드 cvv번호까지 다 적었는데 왜 오류가 뜨지?" / "이름이 잘못된 거 아니야? 여권 이름이랑 똑같나 한 번 봐봐." / "baggage가 수하물 아니야? 돈을 따로 내야 돼?" / "저가항공이라 그럴 수도 있어. 기내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가방 정량이랑 길이 첨부해서 보내니까 한 번 열어봐."
긴 시간이 흐르고 어찌어찌해서 결제를 마쳤나보다. "OO야. 땡큐. 베리머치." 쿨하게 남긴 카톡 답장 하나를 보고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친구 이놈의 일 나몰라라 하고 손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뭐가 그리 마음에 든다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었나 생각해본다.
내가 아무에게나 적극적인 도움이나 친절의 손길을 뻗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범위가 평균치보다 많이 좁은 편이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도움 요청이나 요구들이 오면, 도와줄 상대를 고를 때에 그리 만만한 기준치로 구분하지를 않고 남들보다 약간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 같다. 나와 큰 관계가 없는 이의 일에 신경을 쓸 여력도, 이유도 잘 찾지를 못해서다.
돌아보면 시간이 지나올수록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도움 요청들도 점점 늘어왔었다. 어느 날은 내가 상담소 사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 날은 내 앞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서둘러 끊어버린 적도 있었다. 아마 나의 삶의 모티브나 이미지를 "로빈 윌리암스(Robin Williams)"가 연기했던 역들(굿 윌헌팅의 Sean Maguire교수, 죽은 시인의 사회의 John Keating선생)처럼 꾸려나가고 있던 것이 밖으로도 발현이 된 것일지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도 과거에는 교실과 기도방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만큼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소홀히 했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만나는 이들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에게는 많은 양의 따뜻함으로 반드시 최선을 다했었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았던 것 같다. 아니, 이런 말 써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두루 있었다. 이는 내 주변인들이 나도 모르게 면밀히 파악되어진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눈치에 매우 빠르고 타인의 감정변화에 민감한 내가 단순히 홀로 느끼는 착각 같은 것은 아닐 거다. 어느 후배는 다른 아이들에게 나의 팬(Fan)이라고 자칭하며 다니기도 했고, 몇 명은 나에게 자기의 아프고 쓰라린 과거와 속내를 거의 남김없이 토해낼 만큼 깊은 관계를 요구해 오기도 했다.
학교에 다녔던 지난 2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을 밀어냈던 것 같다.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여러 악취들과 인간적 면모들에 넌더리가 나, 또한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도 아직 해결하지 못해, 사람과 관계를 맺기 전에 전능자의 손을 빌려(전능자가 계시다면) 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철저한 나만의 내면적 변화를 우선으로 경험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판타지에 내 자신을 숨겨 사람과의 부딛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나의 두려움을 그렇게 합리화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무수한 사람들을 매몰차게 밀어내고 2년 정도가 흐른 결과, 많은 인간관계의 요소들이 단정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의 바운더리를 알아챈 느낌이다. 북적이는 그들의 중심속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나 개개인으로 대면할 때에 한없이 다정다감하려 노력하는 사람으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2년을 보냈다. 다행히 그들도 나를 그리 대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나의 그런 밀어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아있었던 몇의 눈망울들이 있다. '이만큼 흔들면 떨어지겠지...' 했는데도 나에게로 와 붙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게 맡겨진 영혼이라 생각하고 어느 시점 이상이 되면 최선을 다해 사랑했었다. "형 앞에 있으면 어디가서 못 하던 이야기들도 하게 돼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늘 남 앞에서 이야기할 때면 어눌해지고 긴장을 많이 해 버벅댔던, 사랑하는 동생 하나의 이야기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이 난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있을때면, 처음에는 본인 스스로가 긴장이 되고 떨려 횡설수설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이 되곤 했었다. 그리고 대화의 말미에 나는 꼭 하나씩 해결책을 숙제처럼 쥐어주곤 했는데, 이 아이는 그걸 성실히 수행해 며칠 지나지 않아 본인의 삶에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매몰찼는가. 그건 아니다. 내게는 총 넷의 친구가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떠나가도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있을 사람들이다. 나 역시 이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고, 나는 그들의 상태나 상황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큰 일이 있지 않는 한 앞으로 그 애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할 때, 그리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육박해 들어가기로 결심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변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 티켓팅을 도와준 친구도 이 네 명중 한 명이다. 티켓팅을 도와주기 전 오랜만에 만나 저녁 식사를 같이 했는데, 이 놈 돈가스를 좀 사 주고 싶어 꾀를 부리다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몰빵을 하기로 했다. 일부러 져 주느라 혼났다.
이들이 내 곁에 어떻게 해서 남게 되었나, 이들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나 생각해 보면 어떤 공통된 특징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적부터 감수성이 참 예민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만큼 자기보호 차원에서라도 사람들을 만날 때 일종의 제한과정을 거친 것 같다. 필터가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나도모르게 여과과정을 거친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본능적으로 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줄 사람들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피하고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내게 안심을 심어준 친구들의 공통점들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우선 이들은 경청이 몸에 베어있다. 일반인들보다 훨씬 거대한 귀를 가진 사람들임을 느낀다. 내가 말했던 것을 잊지 않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쑥 꺼낼 때나, 내가 흘러 한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걸 보면서 느낀 것이다. 확실히 다른 이들보다 경청을 잘 하는 것임엔 틀림이 없다.
두번째로 이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마음이 심하게 따뜻하다. 어쩔 때는 마음이 너무 따뜻해 자기가 손해보는 것도 모를만큼, 아니, 손해 보는것을 알아차려도 본인들 스스로 감수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하고 구멍이 나 있다. 나는 의외로 삐까뻔쩍하고 매무새가 완벽한 아이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다. 나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고 해야할까나. 고등학교를 점수가 높은 곳으로 가게 되면서 그러한 아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와 집합소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 인생 친구들은 다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는 아이들이다. 너무 마음이 순둥이 같고 착해서 탈이라든가, 좋아하는 여자들마다 자꾸 퇴짜를 맞는 연애기술 젬병이라든가, 아이스크림 하나 고를 때도 시간이 참 많이 걸리는, 인생의 어떤 선택에 있어서도 남들보다 느리고, 정작 선택도 잘 못하는 여리고 띨띨한 겁쟁이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과 내가 똑같다는 점이다. 나도 나사가 참 많이 빠져있는 사람이고 그리 똑똑하거나 빠릿하지 못하다. 계산에도 더디며 손해를 참 많이 보고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나는 이들과 어깨동무하며 걸어갈 이유를 찾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그들은 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어언 10년차, 8년차 친구들이다. 그렇게 세월을 함께 해 왔다.
나름의 기준으로 참 엄격한 잣대와 기준을 거쳤음에도 내 곁에 남은 아이들. 내 곁에 두어도 괜찮을, 그리고 괜찮았다고 여겨졌던 이 아이들에게 내가 보내는 헌신도와 희생량은 가히 거대해 보인다. 이제 마음을 열기로 결심했으니, 아니, 나도 모르게 이들에게는 마음이 열렸으니, 그저 이들과 만나면 계산대에 내가 먼저 카드를 내밀고 싶고, 택시비도 두둑하게 챙겨주고 싶다. 이들의 얘기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들어줄 수 있고, 자연히 내 온 관심사와 신경이 그 이야기에 몰입되어 있으니 대화는 재미가 있고 마디마다 폭소가 터진다. 돌아보면 별거 아닌 이들의 모자란 행동들에도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 모두 애정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겠는가.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지는 그런 것 말이다.
웃긴건 이 놈들도 비슷한 행동을 내게 해 온다는 점이다. 내 면면과 내면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려하고, 내가 고독속으로 들어갈 때도 밖에서 끊임없이 외쳐댔던 아이들이다. 나오라고. 나와도 괜찮다고. 그렇게. 아침에 순대국 집에 가면 내가 신발을 고쳐신을 때 이미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치는, 그래서 나를 적잖이 당황시키는 친구들이고, 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파 누워있을 때, 전복죽을 한 그릇 사들고 와 나의 자취방 문을 두드리며 급습하는 그런 아이들이다.
그러게, 따지고 보면 나는 다른 복은 모르겠지만 친구복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들이 내 곁에 있음으로써 남 부럽지는 않은 재산 같은 걸 가진 느낌을 느끼니까 말이다.
그러나 글을 마치기 전, 내 마음 속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굳건하고도 명료한 사실 또 한 가지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도 허물이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언제든지 변하거나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가 싫어질 수도 있고, 혹 어느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실제로 가까웠던 몇몇의 관계들은 말도 안되는 계기들로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가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들에게 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하나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의 생각 속 개념 속에서 이들을 독립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어느 경우에 있어도 내가 이들에게 기대거나 의지하려는 움직임 보다는 오히려 이들이 내게 기대거나 의지해 올 때에 그저 느티나무처럼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흡족해하는 마음가짐이다. 실제로 이러한 '기대없이, 아낌없이 주려는' 마음가짐은 현재 잘 유지되고 있으나, 혹 미래에 내가 약해질 때에 내가 이들에게 기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는 작은 우려도 있다.
내가 전에도 썼지만, 내가 그리는 또 하나의 나만의 이상향은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긍정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인간은 마치 팽이 같아서, 스스로 돌아야 오래 돌 수 있다. 팽이가 서로 기대려다 부딛치면, 그만큼 팽이의 회전 수명은 단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힘이 들거나 죽도록 괴로울 때 이들에게 마음을 굳게 닫고 나의 것을 표현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들이 들어주는 한도 내에서 나의 마음을 내보이고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는 내 마음의 속살을 가감없이 보인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에 혹 이들이 돌변해 나를 찌를 때 내가 감당할 아픔 또한 상당히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돌변할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그러한 사태가 올 때까지 내가 이들에게 무겁게 기대지 않을 것이다. 한 쪽이 너무 기대버리면 다른 사람이 힘들지만, 그래도 어깨동무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서로서로 조금씩은 기대면서 사는 세상이지 않겠는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그렇게 아팠던 날, 이 블로그에 '아픔'이라는 글을 게재했던 바로 그 날 오전. 매가리가 다 빠져 침대에 앉아 있는데 내 친구 한 명이 과외가 끝나자마자 본죽을 사들고 달려와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죽'이라는 음식을 보자마자 다시 위에서는 역겨움과 구토하고픈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잠재우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아이가 오자, 진을 그렇게 뺐는데도 남아있던 에너지가 있었나본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짜고짜 그 애를 데리고 집 앞 카페로 갔다. 이렇게 찾아온 놈을 그냥 보낼 순 없어 냉장고에서 바나나도 꺼내 주고, 집에 있는 라면들과 삼각김밥도 서너게 챙겨주고(내가 줄 수 있었던 건 그것 뿐이었으니까), 카페에 나와서 커피도 사주게 되었다. 나는 죽은 도저히 못 먹겠어서 꽃잎이 두 개 동동 떠 있는 차 한잔을 시켰는데, 비록 힘겹게 홀짝대긴 했으나 그 아이의 뜻밖의 갑작스러운 친절이 고마워 하루종일 마음이 즐거웠다.
이런 것 같다. 나의 숨길 수 없는 특성 중 하나, 상대가 내민 친절이나 감동을 고스란히 넣어두었다가 어떻게든 갚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나의 친구들은 나의 이러한 내 마음을 익숙하게 건드리는 존재들이다. 뜻하지 않게 나를 감동시키는 몇 번의 횟수들 가운데, 나는 오늘도 내가 오래도록 느티나무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