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자위

Sean Keating 2016. 4. 8. 07:04

어찌보면 지금 나는 극도의 행운을 맞이한 걸지도...

인생에서 몇 없는 순간일 수 있다. 

꼭 필요한 용도의 것들이 꼭 필요한 정도로만 내게 왔는데

내가 여기에서 더 욕심을 내고 투정을 부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겠지.

상도덕이란게 있는데. 하늘도 내게 일종의 '네고'를 해 주신 걸지도?

난 행운아다. 자잘한 일들은 별로 운이 없지만...

대략 재작년 즈음부터 무언가 큰 사건들이 내게로 닥쳐오거나 벌어질 때

항상 최상의 것들로 다가왔음을 인정한다.

비관적이던 습관들이 감사함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들이 다시 좋은 일들을 만들어 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연속이었다.


시기는 대략 나의 이십년 세월을 담궜던 기독교를 떠나오면서부터였다.

대차게 믿어서일까. 워낙 집념으로 몰입했던 탓일까.

떠나는 순간 나에겐 수많은 다채로운 가능성들과 미래가 열렸다.

그 좁은 세계에서 감히 들춰볼 수 없었던 온갖 종류들이 쏟아져 왔다.

꿈과 미래, 다양한 생각과 사상들, 갖가지 사랑의 종류와 관계들이 별처럼 꿈처럼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피었고 내게로 왔다.

나는 편견과 잣대와 기준을 치웠고 그 자리에 자유를 놓았다.


그러나 이 모든 좋은 일들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이냐 물으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수많은 꿈들은 현실과 함께 다가온다.

소름끼치도록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하는 현실.

현실은 두려움을 의미한다.

광석이 형이 늘 '설레임'과 '두려움'을 함께 말했던 것처럼

'불안한 행복'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피어나는 꿈이기에 전보다 허무맹랑하지 않다.


여러 생각과 사상들은 고삐없이 질주하며 어느 곳으로도 촉수를 뻗지만

전과 비교했을 때 하나로 정리가 되지는 않는다.

전에는 그저 하나의 개념을 진리로 믿으며 모든 것을 거기에 대입해 참 쉬웠고 또 허무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마 뭔가를 모르는 채로 죽을 것이다.

그저 이 무지하고 약한 우리들이 함께 힘을 합해 이 말도 하고, 저런 주장도 하다보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에 좀 더 근접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인간들의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온 걸지도.


거기에 몸 담고 있었다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만날 수 없었을 관계들도 많이 만났다.

그렇기에 외롭지 않다.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대화를 많이 하며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알아갔다.

국적, 성별, 정체성, 종교, 성향, 성격을 가리지 않으며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도 지구에 사는 사람 모두를 만날 순 없기에, 지금의 인연들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다시 돌아가 마음을 여미려 한다. 

나는 슬프게도 일종의 자위를 하는 중이다.

몹쓸 통증과 흔들림이 내게로 온다. 그다지 행복한 경험은 아니고 불쾌할 때가 많다.

차라리 학원에서 만나는 열 너다섯 살 아이가 더 마음을 달래주는 듯...

강해져야 한다. 많이 약해졌다. 입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수많던 가르침들을 생각한다. 

수도 없이 마음에 박혔고 지침이 되었던 그 가르침들은 아직도 내 마음의 연못에 있다.

내가 동경하는 스승들은 오롯이 혼자 버티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다.

기대하지 않고, 의지도 않고, 덕 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 나도 다시 그렇게 되겠다.


누군가 나를 이유없이 사랑한다면 나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겠다. 

사랑할지는 모르겠다. 사랑은 마음이 시키는 거니까. 확신할 수 없다.

누군가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나도 그를 이용하겠다.

누군가 나와 내 부속품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도 그가 소중해질 것 같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대하겠다.

그 결과는 보장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래야 후회가 없으니까...


나는 행운아다.

행복이 아니라 행운이 겹겹이 쌓여 있다.

왜 그럴까? 말로가 좋지 않을 텐가?

앞으로 고생할 일이 많나? 

수명이 짧은가?

어쨌든 온 행운들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며 살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