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어제는 오랜만에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을 만나면 늘 신경이 곤두선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는 함께 있으면 그저 재미가 없을 뿐이고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어머니에 대한 그간의 쌓인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구성하는 전반 구석구석에 박혀 있다.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할 때에도 그 분이 내는 작은 추임새나, 내리는 상황 판단, 약속을 잡을 때 보이시는 습관, 그 약속을 변경할 때 보이는 작은 언행의 불일치들, 작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대화법들 모두가 나를 찌르며 화가 나게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가끔은 나를 죄책감에 빠트리며 슬프게 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쉽게 화를 내보이지는 않으며 그저 애정도 관심도 적은 한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일관한다. 어쩌면 더 나쁘고 무정해 보이는 나의 행동... 그에 반해 부모님은 아직도 나에 대해 관심이나 애정이 꽤 많은 모양새다.
어쩌면 사랑도 더 하는 쪽이 서러운 패자가 되는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 나와 부모님 간의 형국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니 그만큼 부모님이 더 비정상적으로 사랑을 쏟아붓는 느낌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모자란 사랑의 양을 채우려는 서러운 움직임들... 나는 나의 부모님이 고맙지만, 그래서 장례식 때는 펑펑 울며 슬픔에 잠기겠지만, 지금 당장은 나의 가슴과 마음이 부모님을 밀어내고 있다. 그건 내 몸의 신체적 변화에서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신호다. 왜냐하면 그간 자라오며 얻었던 심적 압박감과 부담감들이 내게 축척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기억들인지는 몰라도 나쁜 기억들이 내 속에 있다. 가정 환경이나 분위기가 좋지 못한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비교적 평탄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왔던 것 같지만, 그 이면에 부모님 조차도 인지하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학대와 폭력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꺼내보았자 빙산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양일 테지만 기억을 더듬어 조금 이야기 해보자면 다른 이들과 달랐던, 나의 가족만이 가졌던 어떤 특성이 있다. 우선 선택권이 없던 나이에 일찌감치 종교라는 틀에 묶였고 그 공동체와 공간에 갇혀 나의 모든 다양했던 가능성이나 생각들을 학살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찬송가를 크게 입을 벌려 부르지 않는다고 예배 중에 나를 교회 밖으로 끌고나와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금요 밤 예배에 가지 않고 친구와 앉아 문방구 앞에서 오락을 하고 있던 저녁 아버지가 뒤에서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차에 태워 교회로 데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회 공동체에 속했고 그에 따른 생활패턴을 가졌어야 했는데, 교회의 모든 모임에 참석해야 했음과 동시에 거기서 피아노 반주 봉사를 맡으며 실력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매일 새벽에 있는 새벽예배까지 나와 반주를 했으니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입장에선 솔직히 참으로 고마운 일인데, 그래도 내가 잃은 것들에 집중해 보자면 나는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 동안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두루 경험한 것들이 남들보다 특별히 적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나의 기억으로 어머니가 나의 독서 활동에까지 검열이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책을 구매하거나 볼 때 신앙적인 서적이 아니라면 따가운 눈총을 맞아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기독교와 반대 위치에 서 있는 인문학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특히 싫어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원했던 신앙서적들 중에서도 어머니가 다니고 있는 교회와 주장하는 바가 틀리면 금서가 되곤 했던 것은 또 하나의 재미있는 기억이다.
우리 가족은 그 어떤 구슬픈 인생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은 두 분이 겁이 많고 심성이 착실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일찌감치 기독교에 침잠되었다. 어쩌면 목회자의 집안보다 훨씬 더 열성을 다했던 평범한 집사의 집안이었다. 아버지보다 비교적 인생사의 굴곡이 많았던 어머니가 일찌감치 먼저 빠졌고, 무신론자에 역사와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아버지는 그 다음으로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야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그 많던 철학과 사상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있는 아버지의 대학 시절 읽었던 수많은 서적들과 썼던 수필들을 볼 때 나는 아버지의 발 끝만치도 따라가지 못했음을 느끼곤 한다. 지금 내가 탐독하고 있는 책들과 좋아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이들이다. 나의 생각으로 아버지는 그 수많은 사상들의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인문학으로 걸 수있는 그 어떤 희망도 찾지 못했다. 결국 확인되지는 않지만 절대자가 있다고 믿고 스스로 그 믿음으로 귀의함으로써 무의미한 삶의 결론을 찾아보기를 결심한 듯 하다.
그 외에도 꺼내기 슬픈 가족의 추억들이 있다. 우선 가족여행의 기억이 없다. 이 이유들에는 많은 복합적인 이유들이 섥혀있다. 우선 내가 일찌감치 집을 나와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버지는 직장 일이 바쁘셔서 늘 토요일에도 회사를 나가시곤 했다. 당연히 어머니는 교회나 그 관련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 가족은 소위 '잘 놀지 못하는' 가족이었던 것이다.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잘 놀 줄 몰랐던, 노는 법을 몰랐던... 그래서 선뜻 어떤 추억을 만들 추진을 하는 사람이 없던 것이 화근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토요일에 꼭 나가 있지 않아도 되었고, 어머니도 굳이 그렇게 수많은 교회 관련 모임과 약속들에 다 참석할 의무도 없었다. 일요일이야 예배가 있어서 그렇다 치고, 토요일이나 아버지의 주중휴가, 혹은 여름, 겨울에 다가오는 정기휴가나 명절 때에도 우리 가족은 집에서 빈둥대며 참 무료한 주말을 보냈다. 명절 때는 심지어 친지들을 보러 가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이 종교와 제사관련 문제로 그들과 크게 싸운 뒤 부터였다. 그래서 주로 쉬는 날에는, 아버지는 마루에서 책이나 신문을 읽다가 낮잠이 들고,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 교회 사람과 수시간 통화를 하고, 나는 방에 앉아 컴퓨터를 하다가 저녁이 되면 함께 장을 보러 나간 뒤 들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표였다. 아직도 소름끼치도록 정확히 그려지는 우리가족의 휴일 시간표는 해마다 바뀌지 않았고 똑같았다.
내가 군생활을 하고 있던 작년 가평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 생애 첫번째 가족 여행이었다. 많은 돈과 시간을 내어 큰 맘 먹고 시도한 첫 가족여행...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이리저리 길에서 시간을 버리기도 하고, 사전 조사도 잘 하지 않아 도착한 곳에 아무것도 없기도 하고, 밤에 팬션에 앉아 술도 없이 그저 윷놀이 한 판을 하고 재미가 없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지만...같이 모여 노는 것이 다들 처음이라 두 분과 나 모두 서툴고 지루했지만, 그래도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시간의 덩어리들을 공유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새벽 나의 손과 생각을 잠시 멈추고 그 공간과 냄새를 회상할 수 있게 하니까. 슬프고 애처로운 그 향기를 짙게 맡을 수 있게 하니까. 나는 여전히 그 가족 모임이 재미가 없었고 다시 가기는 싫다는 마음이 들고, 그 사실이 내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고 구슬프게 옥죄여 온다.
하지만 왜 없겠는가. 나의 가족의 좋았던 점들이... 원래 사람에겐 안 좋은 기억들만 선명하게 남는 법. 혹여나 우리 부모님 욕하지 마시길. 그리고 두 분 먼 훗날 섭섭해 마시길...
어린 시절 아버지와 송충이들이 깔린 비포장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함께 달리며 맞았던 바람과 그 때에 바라보았던 노을지던 햇살은 시간이 흘러 늙어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가끔 아버지와 근처 뒷산으로 산책 하며 낙엽이 내던 서걱서걱 소리들은 내 마음 한 구석 책갈피처럼 남아있는 것을. 그리고 더 어렸던 시절 아버지가 무릎이 아프지 않았을 때 나와 함께 해 주던 수많은 공놀이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찌감치 TV를 치워버렸던 우리 가족,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자세가 연상되는 것은 참 가치있고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즘 소위 위인들의 부모랍시고 나오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부모부터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인데, 그에 따르면 나의 아버지는 참 모범적이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변치않고 보여주고 계신다. 이쯤 되면 그것은 교육의 의도 보다는 그저 그 분이 가진 습관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현재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와 정교하게 들어맞는 상황과 구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나오는 제제와도 비슷한... 나의 왼편에는 따뜻하게 맞아주는 부모님과 밥상, 밝은 빛과 바른 신앙의 길, 온순한 양떼들과 십자가가 서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어린시절 전부를 옥죄였던 기억들을 벗어던지고 오른편으로 뛰쳐 나왔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진흙탕에 몸을 뒹굴고 아픔과 무의미와 어두운 허무함이 가득하지만 자유가 있는 그 곳에 왔다. 어쩌면 그간 용수철이 지긋이 눌려온 만큼 더 세게 튕겨져 나와 생기는, 약간의 비정상적인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나와 다르게 평범하게 자란 아이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탕의 걸음들이 가끔 보이니까. 때때로 어둠의 끝을 향하여 가 보고 싶어하는 마음. 주변에서는 굳이 왜 그렇게? 하고 묻지만 나는 그냥 가고 싶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러한 것들을 이미 통과 했다면 또 모를 일이다.
빙빙 도는 방황과 가난한 마음들로 이루어진 고뇌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을 살았던 무거운 이들을 대충 흝어 봐도 뚜렷한 결론을 내린 이는 아직 없는 듯 하다. 모두가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인 것을. 스스로 스러져 가는 것이라 더욱 매력이 있기에. 뚜렷한 결론을 내린 채 확신에 가득 차 세상을 사는 이들이 귀엽고 어려 보인다. 그 확신으로 남을 강요하기 시작할 때는 슬그머니 마음을 닫고 그를 피하게 된다. 고질병에 걸렸구나... 혀를 끌끌 차면서.
그저 날마다 깨달아 알아 가는 것은 무상. 덧없음... 무언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오히려 더욱 고통을 안기는 느낌이다. 꽃이 지는 느낌. 아프게 같이 품을 때 느껴지는 행복. 그저 작고 단순한 어린아이의 웃음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 그저 힘든게 잠깐 멈춘 순간이 행복이라는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행복이 전제가 아니라 모든게 고통인데 간혹 완화될 때, 간혹 숨통이 트일 때. 그 잠깐의 무지개와 한 뼘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산다.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인 것일까? 나는 나를 향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저린 마음이 있다.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할 때 슬프고 아까움에 눈물이 나는 것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왜 부모님에게 사랑어린 마음이 가지 않을까?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어린 여자 아이에게는 마음이 너덜해지도록 진동하면서, 나의 살아온 인생 전체를 함께 한 저 두 분에게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뒤섞인 모종의 증오마저 드는 것인지... 나는 부모님의 소원을 완벽하게 걷어차 버렸다. 바깥으로 원하시던 변변한 스펙을 갖춘 이십대가 되지도 못했고, 내면으로 바른 신앙심이 굳건한 크리스쳔이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두 분 앞에 설 때면 나는 안팎으로 완전한 실패자의 느낌을 가진다. 이 때문일까. 그저 그 분들 앞에 서기가 싫다.
부모님으로부터 조건 없는 온전한 사랑의 느낌을 받아본 기억이 없고, 나 또한 온전한 사랑을 전해드린 기억이 없다. 나와 그 분들 사이엔 어떠한 거래만 있었다. 상대의 요구사항, 나의 요구사항. 협상 과정... 지켜드리지 못한 약속들.
그저 잠시 지우고 사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충돌할 기회는 적고 나는 오로지 그저 나에게 더 심도 높은 집중을 하길... 하지만 아직도 그 분들에게 도움을 얻고 있어 완벽히 그렇게 하기도 힘들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직 완벽한 독립을 해내지 못했으니 부모님의 말을 들어야 이치에 맞다. 하지만 선택은 내게 있고 투정부리거나 일부러 들이받지 말고 듣는 제스쳐만이라도 보여드리면 성공이 아닐까 한다.
아픈 마음들은 제쳐 두고 내일은 다시 내일의 태양을 맞으며 많은 상념들이 씻겨 내려가길 기대해 본다. 내일은 비가 오지 말기를...
내일부터 다시 뭔가를 좀 더 시작해 보려는 계획 중에 있다.
건강을 좀 챙기려 하는데. 그저 최근 몇 해간 내게 새로 생긴 고무적인 습관이라면 뭔가를 좀 꾸준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걱정은 없다.
주변의 이들이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아픔이 좀 덜했으면 한다.
...
광석이 형 사진전이 열려서 첫 날 바로 다녀 왔다.안내원들은 상당히 불친절했다.
형이 생전에 쓰던 유품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마 형의 와이프였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겠지...
내용은 상당히 뻔했다. 광석이 형의 팬이라면 실망스러울 정도.
형의 목소리로 오디오 가이드를 한대서 귀에 꽂았는데 그냥 그렇다. 거의 들어본 것들.
그런데 한 군데서 내가 멈추어 서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그 90년도 초의 시절 나의 또래였을 사람들이 형에게 보냈던 엽서들 때문이었다.
형이 잠깐 진행했던 불교방송 라디오 '밤의 창가에서'(요즘도 내가 즐겨듣곤 하는)에 사람들이 손으로 꼭꼭 정성들여 눌러적은 엽서들에는 그 마음들이 너무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쩌면 형이니까, 형이었으니까, 형한테만 보낼 수 있었던 엽서들. 형에게만 표현할 수 있었던 이야기.
"...이제 다시는 지금처럼 지내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좀 버는 것 뿐이라고 내 자신에게 애써 변명을 해 봅니다. 어느 날 문득 그리워지면 크게 소리내어 웃어버리고 말겠습니다. 비 오는 오후에 몇 자 적어 보냅니다..."
어느 날 문득 그리워지면 크게 소리내어 웃어버리고 말기.
이 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오늘도 비가 내렸었는데.
가슴 한 쪽이 많이 답답해 글을 더 쓰기가 어렵다.
하고 싶은 말은 수다쟁이처럼 많은데... 글쎄 모두가 자기 살기에 바빠서 이야기를 잘 들으려 하지를 않으니.
애초에 남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있다.
그래, 나는 희귀한 사람이다.
나의 이야기를 받아 주는 곳은 이 일기장 밖에 없구나.
오늘도 네 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