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완전히 버림

Sean Keating 2015. 5. 10. 11:24

내게 한가지 로망이 있다면 기독교를 다시 믿는 것이다. 단, 단서가 하나 붙자면 완전히 버렸다가 다시 믿는 것이다. 이미 내게 종교 이상이었고 삶의 중심이자 모든 것들의 뿌리였던 기독교를 아주 새로운 종교로써(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시 가져보고 싶다.


나는 약 일곱 살 때부터, 중대한 결단을 내린 스물 세 살 무렵까지 기독교를 종교 이상으로 믿는 착각과 우를 범해 왔다. 나는 어떤 생명체를 만들어 냈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해 내가 바라던 대답들을 의식 중, 혹은 무의식 중에 갈취해 왔다. 분명 내 눈앞엔 상식과 논리, 이치 상 맞지 않는 일들이 분명하게 펼쳐지고 목사들의 외침은 거짓이 거의 확실시 되는 그 와중에서도 나는 그것들을 빠르게 묵과해 버리거나 다른 이유들을 서둘러 만들어내 에둘르고 덮었다. (가령, 우리 모두가 아직 열매가 맺히는 과정 중에 있는 미성숙한 영혼이기 때문이라든지, 신의 큰 뜻과 계획을 인간이 섣불리 알리 만무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퉁쳐 온 것이다.) 거기엔 나의 안전한 사후세계를 일단은 보장받은 소량의 이기심과 안도감이 있었고 지옥에 가기 싫은 모종의 두려움도 있었다.


나와 보니 알겠다.

기독교와 교회 내에도 많은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감동스런 사람들은 교회 바깥에도, 절이나 사원에도, 아니면 종교 자체를 잘 모르는 어느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에도 있다.

사람들이 종교에 열광하고 어느 인격체에 빠지고 감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깨달음을 얻으며 자기와 사람들을 성찰해 가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는 그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다움, 따뜻함.

인간의 인간됨.

우리의 본래 모습.

사랑하고, 애정으로 서로 도우며 손을 잡는

바로 거기다.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과 예수란 분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 대상에게 마음을 열며(마치 아이가 인형과 대화를 시작하듯)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던 그 지점은 그 따스함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내가 아직 많은 종교를 잘 알진 못하지만 늘 약자들의 삶을 대변하며 그들의 곁에 있던 예수,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기 전까지 자신은 지옥에서 올라오지 않겠다던 지장보살,

한없는 지혜와 자비라는 본질을 만나기 위해 왕자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싯다르타,

마호메트를 비롯한 4대 성인과 이외 여러 철인들을 볼 때 공통된 그 무엇의 빛나는 가치들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종교로써의 순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 종교들이 '종교'의 바운더리를 넘어 그 이상의 가르침과 덕목들을 교리라는 이름을 붙여 밀고 들어올 때(심지어 그것이 약간의 강제성을 띨 때) 그래서 그것이 겁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고 그 두려움을 중심으로 마침내 재화가 오고 갈 때, 종교는 점차 처음에 없던 상태만 못한 아주 미개한 쓰레기가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중용의 정신이 있으며 모두가 절제성이 있다. 예를 들어 아주 큰 스포츠 경기라도 그 놀이의 존재목적이 오락(즐거움)이라는 걸 잊지 않는 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지 않으며 그 경기가 끝난 후 모두 본연의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간혹 스포츠의 존재목적을 잊거나 그 범주를 초과해 믿는 사람들이 경기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게 될 때, 유혈사태를 비롯한 각종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다.

종교의 존재목적을 잊은 가치전도 현상이 많이 일어날수록 그 자신의 삶이 먼저 망가지고 주변의 공기도 오염시킨다.

나(인간)를 긍정하고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종교의 본래 메세지를 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랜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기독교가 종교 중 위험한 축에 속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많은 종교들 중 가장 대중에게 비판적으로 회자되고, 사회에 악취를 뿜는 것으로 멸시를 받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신 아래 인간을 두어 무한하고 전능한 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얼핏 이것이 나(즉, 인간)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나의 나됨과 내 감정을 억누르고 검열하여 종국에 나를 아주 연약하고 유약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들어진 권위 앞에 양심도 겁도 없는 매마른 인간들이 올라타게 되면(속칭, 나쁜 목회자) 마치 호랑이 등 위에 탄 토끼 마냥 그 불쌍한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미 나를 잃고 나 스스로 설 힘을 잃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여러 해석들과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신(미묘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 그 자신으로 들리도록 하기도 한다.)에게 복종할 것을 명하고, 거기에 헌금에 대한 은근한 권유나 눈치주기, 강요까지 추가된다면 바로 이 그림이 오늘날 우리가 눈만 뜨면 쉽게 볼 수 있는 교회(기독교)의 전체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사실 크리스트교가 그 정도가 심할 뿐 다른 타 종교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신 아래 두기는 마찬가지다. 대체 어느 종교가 신보다 인간을 위에 두겠는가. 그럼 신을 따르는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어지지 않는데. 다만, 기독교가 이렇게 욕을 먹고 사회악으로 낙인 찍히는 이유는 워낙 모집단의 규모가 커서 그 역기능이나 추한 꼴들도 자연히 많이 발견될 수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여기에서 불교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한다. 내가 요즘 불교에 관심을 갖고 이 종교를 많이 좋아하는 이유는, 불교가 갖는 '나'에 대한 긍정성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알고 있는 바 타종교가 갖지 않은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되는데, 축약해 말해서 불교는 석가를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요즘 무문관(저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등)을 비롯해 여러 불교의 역사와 그 안에서의 대,선사들의 남겨진 가르침들을 조금씩 탐구해 가는 중인데 불교를 조금만 제대로 들어가보면, 그들 모두가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서는 자세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고 놀랍다.


매일 아침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불렀던 서암 스님,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라고 외쳤던 운문 스님,

천상천하유아독존을 포효하던 싯다르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버리라 했던 임제 스님을 보라.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과 같이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세계이며 불교는 이를 긍정한다.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순간이다. 


기독교 사상은 초월종교로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 원죄인으로 경건하고 숙연하게 피고인처럼 살아야 한다. 비록 여기에 자녀, 아들이라는 역할과 지위가 부과되지만, 그닥 몰입성은 없어 보인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한번도 본 적 없는 (나타나 주지도 않는)존재를, 그것도 전지전능하고 무시무시한 신을 쉽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상식 선을 쿨하게 무시해 버리고 나도 쉽게 부르고 다녔었다. 나는 절대로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기독교를 가졌다면 '나'는 삶에 있어 조연일 수 밖에 없다. 반면 불교사상은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라 가르친다. 서양 정치철학자 바쿠닌도 자신의 주저 [신과 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성과 정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인간을 명실상부한 노예상태로 이끈다." 니체도 같은 맥락으로 "신은 죽었다"라고 사유했다. 기독교는 영원불멸의 삶을 위해 신의 구원을 기다리지만 불교는 스스로가 구원자와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매달린 절벽...'에서 발췌)


이제 다시 나의 로망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아마 불교인이 되지는 않을 거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 산도 많이 오르고 여러 사찰들을 다니며 스님들과 가까워지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불교보다 기독교가 더 익숙하고 좋아서 불교를 어느 이상 받아들이거나 몰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 내가 어릴 때부터 쭉 물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까마득한 초상과 그리움, 익숙함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나는 이것들을 억지로 죽이거나 밟아 없애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아름다운 (이어서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