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고마운 존재, 고마운 존재들

Sean Keating 2015. 4. 14. 21:47

 「바람은 그대 쪽으로」라는 시가 많이 다가온다. 이 시를 읽으면 어딘지 모를 그 아이의 집과 그 방 안의 창가, 거기에 홀로 앉아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생각을 늘 자주 했었다. 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싶다. 먼지가 되어 가고 싶다. 누군가의 곁으로. 그 사람도 삶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인기가 많고 눈코뜰 새 없이 바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정신없이 행복하게 산다 할지라도...... 유난히 어둠이 깊숙이 내린 밤에 바람이 선선한 창가 근처에 앉아있을 조용한 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바램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녀가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현재로써는 그 길만이 행복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 혼자 할 수 없다면 내가 좀 돕고 싶다. 아무도 없는 그 시간 그녀 홀로 오롯이 달빛만을 마주하고 있을 때 지저귀던 새들마저 자리를 떠버리고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그녀와 온 방안이 덮이는 그 순간에 나는 찾아가고 싶다.


 나는 사람으로 찾아가고 싶기도 하다. 내가 살아있을 때 허락을 받고 찾아가는 것, 이는 매우 행복한 시나리오 중의 한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경우 나는 무생물로라도 그녀의 곁에 가고 싶다. 먼지가 되어 바람을 타고 구름 사이와 달빛을 건너 마침내 그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모든 어두운 그림자와 불행의 시절들이 걷히도록 돕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다만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의 얼굴을 소름끼치게, 정확히 마주하도록 해주고 싶다. 그래서 언제 그녀가 미칠만큼 행복한지, 언제 그녀가 죽을만큼 불행해지는지 그 임계점과 등고선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돕고 싶다. 여전히 그 모든 어려움들은 그녀 앞에 놓여져 있겠지만 그녀가 그 밤의 단편적인 얕은 잠들을 자고 일어났을 때, 다시금 그녀 앞으로 햇살은 내리쬐고 또 다른 하루는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외부의 상황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나 이제 그녀는 그녀 스스로의 감정을 긍정하고 얼싸안기로 다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그녀를 지금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멀리하기로 하는 그 모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나는 반드시 볼 것이다.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 순간의 광경은 ! 

그녀가 그녀 본연의 모습을 찾아 미래의 꽃을 피울 작은 싹을 움트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행복을 나는 누릴 수 있을까?  





 - 내 곁에 보이지 않는 고마운 존재들이 있다. 


 나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혹은 신비로운 힘을 얻고 있는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경험들을 너무나 자주, 수도 없이 한다. 지금이나 과거에 혹은 전생에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었던 존재가 있었으려나? 그, 혹은 그들은 때로는 수호신이 되어 나를 지켜주고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를 말리고 혹 나의 선택에 따라오는 불필요한 결과물들이나 과한 불행들을 치워주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운전하다가 문득 문득 이들을 느낀다. 나는 심연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을 때 여러 개의 밧줄이 하나 둘 내려오는 것을 본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 말이다! 즉각적일 때도 있고 버티다가 더 이상 못 버틸 절체절명의 순간일 때도 있다. 어쩌면 기형도의 말처럼 그들의 그리움의 거리가 너무 먼 건지도... 혹은 내가 아주 늦게 창문을 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들에게 의지하거나 뭔가를 더 빌거나 바라지 않는다. 나는 많은 순간 이들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인지 이인지 모르겠지만 워낙 횟수가 많으니 이들이라고 해 둔다.) 구원받는 많은 순간들 혹은 사람들이 무심코 넘기는 그 많은 순간들에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는 그 짧은 인삿말이 전부다. 내 말은 그 인삿말마저 생략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나는 이들에게 많은 관심이나 시선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내가 노골적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 그것에 관한 만큼은 절대로 해주지 않거나 오히려 늦게, 혹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 지견으로 고마운 존재들과의 관계는 쿨하고도 가벼워야 한다. 대신에 나는 내가 얻은 이 수많은 특권과 호의와 행복의 조건들을 잘 안고 간직해 (만약 내가 살아있는다면) 이 땅에 나와 인연이 닿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고 마음문을 살며시 두드리거나, 눈동자가 예쁘거나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나, 억울하고 슬픈데 표현조차 잘 하지 못하는 서러운 미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답없는 어떤 선물이 되어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일찍 이 삶을 뜰지 오래도록 숨이 붙어 있을지... 그러나 후자라면 그 동안 나는 어떤 크고 위대한 일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남이나 자연에게 피해나 방해는 최소한으로 주며 사는 조용한 노동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극단적으로 나에게 진입해 들어갈 것이고 그 육박한 거리 만큼 남을 읽어내려갈 것인데 만약 내 심장이 동한다면 나는 마냥 조용하게 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땀을 많이 흘리고 싶다. 


 남에게 겁도 허락도 없이 척척 진일보해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일 마다하고 가장 먼저 피해야 할 모습이다. 어제 읽은 헤세의 글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모든 것을 엷은 금박을 씌운 물건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접촉해야만 한다...] 이 구절을 읽으며 이성복 시인의 「그 해 가을」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그 해 가을... 나는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여인을 만났다..." 어떤 사람이 물방울 같아 보인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다. 쉽게 만질 수 없는 존재, 그 존재들이 조금만 늘어났으면 좋겠다. 한꺼번에 많이 늘어나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아마 나의 성장과 함께 닿아가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눈동자들이 많아지는 것... 그만큼 내 세월도 주름도 나이테도 늘어만 가겠지...


 언제나 소박한 꿈들을 적는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랑, 행복, 방랑, 꿈과 같은 것들은 묘약과도 같은게 아닐까? 나는 무시로 이들에게 접촉하며 하루에도 수도 없이(몇 분 단위로) 이 가치들에게 생기와 힘을 공급받는다. 내 몸은 원치 않는 곳에 놓여있고 내 얼굴은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있지만 어쩌면 내 몸 전체와 내면 속의 우주와 같은 세계는 많은 폭발음이 들릴 만큼 깨어나고 터지고를 반복한다.


 그만큼 나를 흔드는 것들과 많이 마주해 기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인터뷰를 읽으며 울었고 오늘은 시를 읽으며 울었다. 그제는 형의 노래를 듣고 부르다 울었다.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는 나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다.


 이유야 어찌되고 상황들이야 어찌한들 오늘은 오늘이었고 내일은 내일이다. 나는 약 1년 후, 혹은 그 전에 내가 근 8년간 사랑해왔던 아이에게 나의 마음을 전달할 것이다. 내민 손을 잡아 줄까? 나의 가슴이 받아들여질까? 여기서 확률 게임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수개월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 기점으로 뭔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점이다. 그 많은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이고 (이 뜨거워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을)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삶의 방향이나 빛깔들이 달라질 것이라는게 참 재미있고 설렌다. 지금 그려지는 그림이야 멀리서 그 아이의 행복을 그저 빌어주고 소리없이 도와주며 생을 사는 것이지만 나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쉽게 호언장담하지는 못한다. 



그야말로 습작에 가까운 글을 마쳤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의식의 흐름' 기법인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어 조금은 기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