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오늘의 일기

Sean Keating 2014. 9. 3. 02:56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으나 멍 때리다가 10시 버스를 놓치고 12시 반에 되서야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받는 햇살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좋았다. 

성인이 요놈이랑 피파를 떴다. 첫 판에 내가 지더니 다음판 부터 내가 내리 이겼다.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모르던 성인이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래서 어느 판 부터는 힘을 빼고 했다. 다행히 이놈도 이기면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게임이 되었다. 나중에는 다시 잘하려고 해도 자꾸만 성인이가 이겼다. 


느즈막히 서울로 출발했다. 법륜스님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가다보니 어느새 내가 졸고 있었다. 졸린 눈을 반쯤 뜨고 버스 차창 밖을 보니 차가 막혀 아직도 반도 못 갔다. 더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서 노래도 듣고 다른 것도 들어보았지만 힘이 나지 않고 우울했다. 다행히 팟캐스트 중에 컬투쇼가 있어서 어제 정선희씨와 함께한 40분짜리 코너를 듣고 나니 자잘한 웃음도 나고 재미가 있었다.


저녁 여섯시에 약속한 신림역에 도착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재철이가 큰 우산을 들고 웃으며 맞아주었다. 날 보더니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이 작아졌다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현이도 만나 셋이서 신림 사거리를 걸으며 먹을 곳을 찾다가 낭풍이라는 김치찌개 집에 들어가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김치찌개 속 고기가 크고 두꺼웠고 밥도 많았다. 비가 오는 날에 땀흘리며 김치찌개를 먹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내가 내려고 했는데 애들이 카드를 먼저 내 버렸다.


그 다음은 진서네 정원이라는 카페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8시에 소대로 전화하는 것도 까먹을 만큼... 배가 아프도록 웃기도 했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마음의 잔잔한 평안 같은 것을 얻기도 했다. 서로를 공감하며 한번씩 내뱉는 추임새나 대답들이 왠지 정겨웠고 또 듣기 좋았다.


시간이 늦었지만 재철이의 자취방에 가 보고 싶었다. 신림 고시촌과 녹두거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후줄근한 옷차림의 젊은이들로 붐볐고, 비좁은 거리를 꽉 막은 차들과 그 사이를 아슬아슬히 지나가는 5515번 버스도 변함없이 다녔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살던 추억이 떠올라 잠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 곳에서 나는 혼자 살며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많은 글들을 썼다. 지난 해 여름에 이사 와 겨울에 나갔던 이 거리엔 한 마리의 고양이도 다녀갔고, 홍콩의 국적을 가진 한 여자아이도 다녀갔고, 늘 고시부페에서 창가 쪽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던 나라는 사람도 다녀갔었다. 롯데리아에서 새우버거를 할인하는 날 두 개를 사다 먹은 후 배탈이 나 이틀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던 기억... 정신에 이상이 온 옛 친구가 가출을 해 내 방에서 재워주다가 그만 잃어버려 밤과 아침 내내 찾으러 다닌 일... 마음이 답답해 혼자 코인 노래방을 찾았던 날... 아픈 고양이를 들쳐업고 동물병원으로 달리던 순간...


추억에 잠기며 걷다 보니 재철이의 자취방에 도착해 있었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편하고 아늑했다. 재철이의 책상에는 여러가지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여느 고시생 책상과 다를 바 없었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이 존경스러웠고 또 대견하기도 한 동시에 안쓰럽기도 했으며 또 사랑스러우며 부럽기도 했다. 


잠시 있다가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좁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큰 방이 하나 비어서 들어갔다. 우리는 여섯 곡을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일어나, 기억의 습작, 서른 즈음에, say it to me now를 불렀다. 목은 쉬었지만 마음이 뭔가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와 같이 있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주현이의 정거장을 한 개 남겨두고 내가 물었다. "주현아, 견뎌야 하는 거겠지?" "다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같아." 주현이가 대답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견디며 살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울고 싶어도 눕고 싶어도 때려 치고 싶어도 견디고 버티며 살아가기에 서글픈 인생이다. 나도 버텨야 하겠지. 과연 이 버팀목을 지탱하는 줄이 끊어질까, 끊어지는 날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부랴부랴 강남구청으로 향했는데 밤 11시 40분 정도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권사님 두 분과 기다리고 계셨다. "너를 위해 제일 기도 많이 해 주시는 분이다. 인사 드리렴..." 막 기도회를 마치셨는지 눈가가 촉촉한 두 분께 고개숙여 인사를 드렸다. 생전 알지도 못한 나를 위해 마음을 내고 기도를 해 주신다는 사실 자체가 고마워 견딜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허리를 많이 숙여 인사를 드리는 것 뿐...


"엄마 내가 운전할까?"

"비 오는 날은 차선도 안보여서 안 돼."

"감속 운행하니까 오히려 더 안전하지."

"다른 차들이 감속을 안하지."


결국은 엄마가 운전대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게 그저 감사했고 좋았다. 내용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대화는 목소리와 흐름이다. 나는 때로는 가만히, 때로는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어머니는 요즘 카카오톡 프로필에 나의 군복 입은 사진을 올려 놓았는데, 사람들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는 횟수가 부쩍 많다고 했다. 영혼이 맑고 순수해 보인다는 분도 있었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형상이 보인다고 하기도 했단다. 터무니없는 말들에 황당함을 감추며 그저 덕담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 인상이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호감을 주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을 해 주셨다. 그리고는 나의 얼굴과 인상이 2010년도와 너무도 달라져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 인상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나도 내 얼굴이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신기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짝짝이었던 눈 한 쪽에도 상커풀이 생기며 균형이 맞추어졌고, 안경을 벗으며 눈이 한 층 또렷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필요없는 군살이 빠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무엇보다 거울을 보면 불편했던 내 자신이 어느덧 거울을 보며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대강 이 일들은 작년 초 즈음부터 일어났다.


집에 다 와 갈수록 비는 장대비가 되어 차창을 때렸다. 차 트렁크에는 엄마가 오늘 산 포도 여섯박스가 향긋한 포도 향내를 냈고 차내 에어컨의 찬 공기가 가끔씩 팔을 스치고 지나가며 어루만졌다. 어머니가 말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이야기하며 오니까 좋네.... 엄마 혼자 왔으면 꾸벅꾸벅 졸다 왔을텐데..." 어머니에게 있어서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었다. 나는 오늘 어머니로부터 나 덕분에 좋다는 말을 들으며 거대한 행복을 느꼈다. 이 행복은 세상의 비슷한 무엇과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것, 작은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실용가치와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나의 어두움이 나를 끌고 다니도록 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우산이 없었기에 주차장에서 아파트로 들어오기까지 그 짧은 순간 비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를 뒤따라 들어가며 쏟아지는 비를 후두둑 맞는데 웃음이 지어졌다. 차가운 빗물이 순식간에 나를 적시고 마음 한 구석도 어딘가 적셔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행복이 내 곁으로 온 느낌이었다. 나는 오늘의 이 행복을 글로 남기자고 다짐했다. 오늘 얻어진 이 행복의 양이라면 휴가를 나온 몫을 톡톡히 해내고도 남는 것이라 느꼈다.


집에 오니 아버지가 나의 이부자리를 펴 놓아 주셨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당신의 방에 불도 안 끄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인기척이 나자 깨셔서는 부시시한 눈으로 손을 들어 흔들며 나와 엄마를 맞아주셨다.

 

소중한 친구들이 있어 감사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견뎌낼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많은 날들을 삼켜내면 자유와 사랑이 찾아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팍팍한 곳에서 나의 고유한 정신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마음의 끈을 동여 맨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정신, 약자에게 더 눈길이 가는 마음,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고픈 마음, 늘 따뜻해지길 지향하는 마음.


밖은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