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1] 일별(A G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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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씨의 책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일별'이라는 단어를 마주친 뒤로 하루종일 그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일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별'과 일별한채로 사랑을 시작했다.
내 인생 모든 순간들이 일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마음을 담아 모든 것을 응시할 때 사랑도 아름다운 것도 흘러나오는데
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은 보지 않았고
사랑하는 것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고등학교 교정을 거닐게 되었다.
은혜동의 교정, 빗물이 떨어지던 날들,
철없이 아리고 슬프면서도 좋았던,
비와 닮은, 꼭 비와도 같은 그 날의 기분들이 기억났다.
은혜동이다.
토요일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급히 계단을 내려와 문에 서니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건물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그 아이가 내 앞에 있었다.
수줍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산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녀와 어떻게든 엮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온,
그리고 내 딴에는 엄청난 용기를 낸 한마디.
그 아이는 잠깐, 아주 잠깐동안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처럼 사물함 위를 뒤적이며 우산을 찾더니
이윽고 나에게 다가와 "없는데.."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말이 더 미안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과하게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해 준 것 같다.
그리고 바삐 그 곳을 빠져나왔다.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몇 걸음 뛰어가다가 잠시 옆 공중전화 박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가 너무 세찼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 생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작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세차게 앞으로 달려나간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 황홀했던 순간을 빗방울들과 함께 날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어갈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짧은 찰나였다.
공중전화 부스 유리창으로 반사되어 비친,
그녀가 아직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은.
그렇게 나는 그 아이와 첫 번째 일별을 했다.
이윽고 그 아이는 우산을 하나 집어들고는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나, 다짜고짜 수화기를 든 채 전화를 거는 척을 시작할 만큼 당황했던 시간.
수화기를 귀에 댄 나에게 말없이 우산을 건네던 그 눈빛,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서 5년을 넘게 고생을 했다.
내가 "고마워." 하고 속삭여 말했을 때에 지어주던 잠깐의 수줍은 미소가
미국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나를 괴롭혔다.
그 우산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간단한 사실 하나를 암시했을지 모른다.
그 이후에도 나는 그 우산을 접다가 손에 작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손에 선명한 선혈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짧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도 작은 사실 하나를 암시하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내 선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강렬했기에.
이윽고 내 꿈은 다른 것에 의해서 포기되어졌다.
한 때는(Once)
한 때는(Once)..
그러나 더는 아니네요(But not anymore)..
오늘은 노래 Once가 하루종일 갈고리처럼 가슴에 걸려 나를 끌고 다닌 것 같다.
나도, 그 아이도
서로에게 안녕을 고하게 되었지만.
지금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내가 그 아이와 통성명을 시작할지 조차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한 때는(Once) 그랬다.
숨을 들이마시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던.
나를 쩔쩔매게 했던 많은 것들이 있지만, 너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사랑했다고, 좋아했다고 표현 할 수 있다.
어렸지만, 너를 위해 매일 새벽 눈을 뜨고, 일을 하고, 고생을 할 각오를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그 날들이 있다.
그 날들 만큼은 바래지지 않도록 하고 싶다.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아프고 시렸던
그 각각의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내게 무엇을 선물해 주었던 간에.
2013/04/03 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