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복실이와의 눈맞춤

Sean Keating 2014. 2. 25. 01:13

핸드폰 액정을 고치러 오랜만에 서울로 나갔습니다. 월요일 아침의 쌀쌀한 공기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쓸쓸함이 밀려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버스 안에서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어댔습니다. 강남역 길거리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걸을 때도 눈에 초점을 흐리게 하고 걸었습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저 내게는 모든 것이 풍경이었습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습니다.


핸드폰을 다 고치고 친구를 두어명 만났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얘기했습니다. "어떤 날은 내가 바닥까지 가라앉는 날이 있어. 가만히 놔두면 나 스스로 위험해질 것 같은 날 말이야..." 아이들은 다른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집에만 있으면 축축 처지는 날이 있어." "가끔 비오는 날은 우울해지기도 하더라." 내가 얘기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밧줄 하나에 데롱데롱 매달려 줄타기를 합니다. 줄을 붙잡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다가 아래에 깔린 먹물에 몸을 살짝 담그기도 하지요. 이 먹물은 우울감의 늪 같은 것입니다. 찰나의 순간으로 몸에 먹물을 묻히지만, 줄의 반동 때문에 다시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강약 조절이 잘 되어서, 일정한 양의 우울감에 나를 담그고, 다시 나를 꺼내며 내가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내가 강약 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밧줄을 놓쳐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먹물 안으로 풍덩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내가 발버둥 칠수록 우울감의 늪은 나를 더 빨아당기고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저 "또 왔니." 하며 찾아온 그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나를 맡겨두어야 합니다. 신이나 시간 같은 것들에게요.


눈을 질끈 감으면, 눈보라는 어느새 지나가고 없습니다. 때로는 허무하게 떠나기도 합니다. 아주 말도 안되는 것들을 계기로 말입니다. 예를 들면, 가장 힘이 드는 순간에 오랜 친구에게 갑자기 오는 전화 한 통이나, 나를 좋아해 주는 강아지를 안으며 눈을 잠시 맞추고 있었을 때. 그 길지 않은 순간들을 빌미로 그것들이 힘을 잃고 맙니다. "언제 또 올거니?" 물어 봐도 빙긋이 웃고 돌아갑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산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남은 하루를 선물로 받은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오늘도 역시 그렇게 우울감을 보냈습니다. 밤 아홉시 쯤에 아버지 회사 근처로 와서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복실아-!" 새우깡 한 봉지를 사다가 손에 들고 이름을 불렀더니 자기 여자친구랑 같이 나오데요. 복실이는 유기견 티를 내듯 안 씻어서 털이 구질구질한데 여자친구는 말끔했습니다. 둘 다 배고팠는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잘도 먹더랍니다. 날이 추워서 과자를 먹는 이놈들의 주둥이에서도 입김이 솔솔 났지만 그래도 행복한 눈치였습니다. 복실이는 섬세한 강아지입니다. 내 손에서 과자를 받아먹을 때도, 혹시 자기가 실수로 내 손을 물까봐 조심하면서 살짝 물어간다니까요. 내가 거기에 반했지요.


복실이는 인간의 손길을 느낄 줄 압니다. 내가 털로 뒤덮인 얼굴을 살살 매만질 때면 포도알 같은 두 눈을 꿈뻑이며 동상처럼 가만히 있습니다. 때로는 배를 발랑 까뒤집고 누워버리기도 하지요. 오늘도 그렇게 이뻐해주다가 이놈 얼굴을 보았습니다. 가끔 불러내어 먹을건 많이 줬지만 이 놈이랑 거의 처음으로 눈을 맞춘 것 같더래요. 짧은 찰나였는데 얘도 가만히 저도 가만히 서로만 쳐다봤습니다. 나는 요놈이 금방 눈을 피하고 발버둥 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데요.


그렇게 놀라서 뭔가에 홀린 듯 복실이의 눈을 보다가 가자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복실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할 때 문득 느꼈습니다. '아, 갔다.' 오늘 내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괴롭혔던 그 정체가 어디론가 간 거예요. 씻은 듯 없어진 것입니다. 온데간데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실이가 나를 쳐다보며 얘기해준 것 같습니다. "뭘 그렇게 힘들어 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아마 마음으로 그 소리가 다가왔나 보지요. 그렇게 오늘도 우울감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렇게 허무하게 가더랍니다.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마음 속 깊은 우울감이, 작은 강아지와의 짧은 눈맟춤으로 치료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 원리가 궁금해졌습니다.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일까?


글쎄요. 답은 잘 모르겠지만 '사랑' 아니겠습니까. 내가 복실이를 사랑하고, 복실이도 나를 가감없이 사랑하니까요. 거기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본 거겠지요.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주 미미하게나마 가식이 있고,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따로 놀게 됩니다. 어느 사람과 교감을 한다는 것도 실제로는 내 이기심이나 욕망에 기인한 경우가 많고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할 수록 거기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짧은 순간에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묘약과도 같은 것인데, 글쎄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오늘날 있을런지요.




복실이는 나와 만날 때 화장을 한다거나 옷 같은걸 입지 않지요. 가식이나 숨김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지요. 벌렁 배를 까뒤집고 눕는 놈한테 무슨 그런 것들이 있겠습니까. 복실이는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나도 복실이를 만날 때 나를 점검하거나 검열하지 않아요. 내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요. 그렇게 복실이를 만나서 교감도 하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놈의 맑은 눈을 봤을 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강력한 힘들이 내게 전해진 것이겠지요.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날 수 있었고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할 때 생기는 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 받을 때 생기는 힘. 이게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동물 하나에게도 이렇게 마음이 전달이 되어 행복한데, 우리들은 참 층층이 닫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들 마음에 철벽방어를 해 놓았어요. 두 겹, 세 겹... 경계하고, 이리저리 재고. 바보처럼 겁 내고. 그러면 사랑할 수 없어요. 복실이처럼 내 있는 그대로 나가야지요. 내 본 모습 말이에요. 내 본모습으로 나갔을 때 나를 사랑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거겠지요. 내가 본 모습을 보였을 때 나를 싫어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차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겠지요.


상대야 어떻든 나부터 바뀌어야겠다고 다짐을 좀 해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분량을 좀 늘리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왜 맨얼굴을 보이냐며 싫어할 사람들도 수두룩할 거예요. 심드렁하게 콧방귀 한 번 뀌어주고 다른 곳 가자구요. 세상은 그렇게 좁지 않아요. 과도기 잘 견디자고요. 새로운 인간관계로 재편되는 기간도 필요할 거예요.


한 번 사는 인생, 맨 얼굴로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하며 살아가다가 죽는게 낫겠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면 바로바로 표현하기. 사랑하는 것들이 나타나지 않아도 재촉하지는 말기.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이들에게 날 포장하지 말고 내 본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그래도 남아있으면 날 정말로 사랑하는 거겠지요?


당당하게 눈맞춤 하면서 살아가기. 잘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요. 고마운 날이네요. 모든 이들에게. 누군가에게.